퇴직을 두려워하는 이유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조기유학을 위해 기러기 가족이 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고, 유명 대학 진학을 위해 가족 모두가 불편을 감수하고 유명한 입시 학원 근처로 이사 가는 것도 높은 교육열을 반영한 사례이다. 조기 영어도 높은 교육열의 한 사례이다. 필자는 L과 R 발음을 좋게 만들겠다고 혀 수술을 하겠다는 부인 때문에 부부 싸움을 한 남편의 하소연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유치원부터 영어를 익히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받아 유명 대학에 들어간 다음 유명 대기업에 취업해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함일 것이다. 유명 대기업에 취업한 자식을 둔 부모는 누가 묻지 않아도 자식 자랑을 한다. 아마도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면 자녀가 평생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녀가 유명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온 가족이 학원 근처로 이사하고, 학원비를 내기 위해 가족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다. 즉, 유명 대기업 입사는 조선 시대 과거에 급제한 것과 같은 수준의 가족 목표인 것이다.
수험생 본인의 목표도 가족의 목표와 비슷하다. 유명 대학 입학 혹은 유명 대기업 입사라는 가족의 목표에 반발해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이런 사람은 아주 일부일 뿐이다. 많은 사람은 유명 대학에 입학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가족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한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취업하는 순간 회사가 망하지 않으면 매월 일정한 월급을 받기 때문에 월급으로 의식주 해결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또한, 입사하면 소속감도 생기고, 일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업무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하는 심리학 이론이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이다. 매슬로 박사는 생존을 위한 기본 욕구인 생리적 욕구,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안전 욕구, 소속감이나 사랑 등의 사회적 욕구, 자존감과 존경과 관련이 있는 존중 혹은 존경 욕구 그리고 자기 발전과 창의성을 추구하는 자아실현 욕구로 구분하였다.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하위 욕구로, 사회적 욕구, 존중 욕구 그리고 자아실현 욕구를 상위 욕구로 구분하였고, 사람의 욕구는 하위 단계의 욕구 충족에서 상위 단계의 욕구 충족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대기업 입사와 중소기업 입사를 욕구단계설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대기업은 일반적으로 중소기업과 비교해 높은 급여와 복리후생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대기업은 안정성이 높지만, 중소기업은 경영난을 겪을 위험이 크고 작업 환경이 대기업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안전하지 못하다. 즉,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하위 욕구를 충족할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기업 입사를 위한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상위 욕구 충족에도 대기업이 훨씬 유리하다. 대기업은 큰 조직 내에서 다양한 사람과의 네트워킹 기회를 제공하지만, 중소기업은 네트워킹 범위가 제한적일 수 있다. 대기업에 다니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존중받는 정도가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보다 강하다. 마찬가지로 경력 개발 기회도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이 훨씬 많기 때문에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상위 욕구 충족도 수월하다. 이런 이유로 시간과 노력이라는 많은 자원을 투자해 대기업 취업을 바라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이다.
일출 다음 일몰이 기다리는 것처럼 입사한 사람은 언젠가는 퇴사를 해야 한다.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나이가 정년에 가까워졌거나 정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만두어야 하는 퇴직도 있다. 이럴 때 즐겁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기보다는 불안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퇴직하는 사람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기업 퇴직자와 중소기업 퇴직자가 느끼는 불안감의 정도는 다를 수 있다. 대기업에 다니던 사람은 상대적으로 급여가 높았기 때문에 노후를 위해 준비한 자금이 중소기업에 다니던 사람보다 많을 수 있기 때문에 노후자금 마련은 대기업 퇴직자가 중소기업 퇴직자보다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심리적인 충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중소기업 출신보다 대기업 출신이 더 클 수 있다.
1. 성공의 기준
한국 사회에서는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교육과 취업 과정에서 대기업을 목표로 삼는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기업에서의 경력이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직결되며, 퇴직 시 그 지위의 상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 집단주의 문화
한국은 집단주의적인 문화가 강해 개인의 성취가 가족이나 사회의 기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은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지며, 퇴직 후 이러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면 심리적 부담이 커질 수 있다.
3. 사회적 비교
대기업 출신은 주변 사람들, 특히 중소기업 출신과의 비교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겨진다. 퇴직 후에는 이러한 비교가 더욱 두드러져, 자신이 과거보다 낮은 위치에 떨어졌다고 느끼게 된다. 이는 자아 정체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4. 사회적 낙인
대기업 출신이 퇴직할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실패자'로 인식될 수 있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는 대기업에서의 경력이 더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어 퇴직 후의 삶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높인다.
5. 심리적 압박
대기업에서의 성공 경험이 많을수록 퇴직 후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커질 수 있다. 대기업 출신은 높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해지며, 이는 퇴직 후 우울감이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기업 출신 퇴직자가 퇴직 후 만난 사람에게 “제가 대기업 출신입니다”라고 말하면 “좋은 회사에 다녔네요”라는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끝이다. 좋은 회사에 다녔다는 말을 듣더라고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할수록 부정적인 감정만 느낄 뿐이다.
퇴직하는 사람의 심리 또한 매슬로 박사의 욕구단계설로 설명할 수 있다. 취업하는 순간부터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생기고, 급여를 받을 수 있지만, 퇴직하면 일도, 직장도 그리고 급여도 받을 수 없게 된다. 즉, 상위 욕구와 하위 욕구 모두 충족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람은 불안감을 느끼고 심한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
불안감은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든다. 사람은 불안한 상황이나 자극을 피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이럴 때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을 하며, 선배나 동료 혹은 언론에서 보도된 퇴직자의 비참한 사례들을 떠올리면서 퇴직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기보다는 퇴직하는 날까지 퇴직을 피할 방법만 찾기 때문에 새로운 직업을 찾기 위한 노력을 주저하게 된다.
퇴직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퇴직을 직면하고 준비하기보다 피하는 기간이 길수록 퇴직 후를 대비한 준비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거나 과거로 퇴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퇴직 후 생활자금이나 사회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준비하기 어려워지고, 퇴직 후의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준비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 퇴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은 퇴직 후의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재취업을 준비하는 등의 행동을 한다. 이런 사람은 퇴직 후의 만든 새로운 삶에 대한 만족도가 더 클 수 있다.
직장인에게 퇴직은 그동안 노력했던 삶에 대한 보상일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처럼 피할 수 없는 퇴직이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준비하면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퇴직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퇴직을 맞이하는 태도의 차이에 따라 퇴직 후의 삶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퇴직은 새로운 출발이다. 퇴직이라는 현실을 마주치기를 꺼릴수록 불안감을 느끼고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하기 때문에 건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퇴직은 새로운 기회를 찾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좋은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퇴직 후의 삶을 계획한다면 퇴직 후의 삶에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