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앞에서 망설이던 나

by 말 없는 나무

아빠와 나 사이가 서먹해졌을 때, 나는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고 서울에서 첫 자취를 하며 일에만 집중했다. 무작정 상경해 일을 시작한 것이 문제였을까. 보통 수습 세 달이면 적응한다는데, 나는 석 달, 다섯 달이 지나도 적응하지 못했다. 내겐 다 적응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막상 현실은 달랐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코로나 시기가 오자 병원은 전보다 훨씬 바빠졌다. 검사 업무보다 허드렛일이 더 많아졌고, 작은 병원이라 오후에는 접수도 겸해야 했다. 독수리 타자였던 나는 수많은 사람의 코로나 접종을 등록하고 신환을 입력하다 보니 타자 속도도 늘었다.


몇 달이 더 흐르자, 사회적 거리 두기가 풀리며 회식이 허용되는 때가 왔다. 어릴 적 나는 회식을 기대하던 편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회식은 일의 연장이었고, 막내인 나는 원장님과 선배들을 챙겨야 했으며 끝까지 남아 있어야 했다. 늘 피곤했던 나는 끝까지 버티지 못했고, 회식마저 버거웠다.


그 무렵 일요일까지 근무하는 근무형태도 힘겨웠다. 일주일에 하루 쉬긴 했지만, 오전 9시부터 밤 8시까지 이어지는 하루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약 1년 3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혼나면 늘 주눅 들던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우울증 자가검사를 해보았고, 결과는 상담과 치료가 매우 필요한 수준이었다. ‘이러다 정말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고민 끝에 원장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주변 지인 추천을 받아 가까운 정신과를 처음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병원 앞에 서서 한참 망설였다. ‘그냥 말하지 말 걸, 좀 더 생각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가 알아보지 않게 후드티를 깊게 눌러쓰고 병원에 들어갔다. (그때 왜 그렇게 숨고 싶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정신과에서 긴 문진표를 작성하고 약 20분 동안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생각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의사에게 털어놓았다. 원장님은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셨고, 나는 울지 않고 담담히 말할 수 있었다. 불면과 집중력 저하가 문제였기에 약을 처방받았고, 원장님은 “일을 그만두지 말고 약을 복용하며 경과를 보자. 가족과의 관계를 끊을 필요는 없지만 잠깐 연락을 줄여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라고 조언하셨다.


처방받은 약은 종류가 많았다. 수면제 덕분에 잠은 깊이 잘 수 있었지만 집중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과 약을 먹는 동안에는 술을 피해야 했는데, 약속 있는 날이라 며칠 늦게 복용하곤 해서 회복이 더뎠다. 2주에 한 번씩 병원을 방문해 경과를 보고 약을 조정받는 일이 반복되었고, 어느 순간 가족에게 내 상태를 알리고 싶어졌다. 걱정할 테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전화를 걸었을 때 할머니가 받을 줄 알았는데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나… 우울증 진단받았고, 지금 정신과 다니며 약 먹고 있어.”


아빠는 공감하기보다 현실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울증? 요즘 다들 힘들다. 독립하면 다 힘든 거야. 별것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물론 아빠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딸이 아프다는데 공감 대신 현실을 말하는 아빠의 반응이 나는 서럽게 느껴졌다. 아빠에게 서울에 올라간 사실을 말을 안 한 것에 대한 서운함도 함께 뒤섞여 있었다. 예전의 말들—“엄마 없이도 잘 자라는 사람도 있다” “동생보다 못하면 어찌 살래” 같은 말들이 떠오르면 나는 혼자 울기도 했다. 결국 나는 다시 집에 연락을 끊었다.


결국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버텼지만 직장을 계속 다니긴 어려웠다. 1년 5개월 정도 근무한 뒤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쉬게 되었다. 원장님은 “일하면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지만, 퇴근 후엔 씻고 잠들 시간이 전부라 내가 좋아하던 일을 할 여유는 없었다. 주말에도 너무 지쳐서 아무런 계획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다행히 집에 혼자 있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남자친구가 많은 부담을 떠맡는 상황이라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한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잃어버린 채 집에 머물렀다. 그러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고, 집에서 걸어서 25분 거리의 병원에 다시 취직했다. 그때부터는 남은 약을 의지 하며 버텼고, 약에만 의존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껴서, 결국 약을 끊고 스스로 버텨보기로 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