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을 앞두고도 내 삶은 늘 힘겨웠다. 성인이 되고 독립하면 조금은 나아질 거라 믿고 버텼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또 다른 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야 비로소 내 성격의 문제를 깨달았고, 그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첫 취업은 병원이었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들어간 곳이라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고, 나와 같은 시기에 다른 친구도 입사했다. 실장님께서 대학교 선배였기에 긴장은 더 커졌다. 내가 맡은 곳은 생리기능 검사 파트였고, 주로 치매 환자분들을 검사하는 자리라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며칠 동안 매뉴얼을 익히고 선배들이 하는 검사를 따라 보며 배우려 했지만, 내 손끝은 쉽게 늘지 않았다. 반면 동기는 여러 파트를 오가며 빠르게 성장해 갔고, 나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왜 난 시키는 대로 하는데도 이 모양일까’라는 자책이 꼬리를 물었다. 알바 경험 하나 없던 탓에 사회성이 부족한 건 아닌가 싶었고, 선배들이 나를 가르치다 지쳐가는 모습이 괜히 더 미안했다.
결국 나는 ‘이곳이 나와 맞지 않아서 힘든 거겠지’라며 스스로 위로했지만, 사실은 불안이 나를 짓눌렀다. 매일 아침 먼저 출근해 장비를 세팅하고 선배들에게 커피를 타 드리는 일도 나에겐 낯설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감은 점점 무너져만 갔고, 끝내 수습 기간 두 달을 채우고는 병원을 떠났다.
그 후 다시 시골로 내려가 지내다가, 졸업식 즈음에는 학교 근처 친구 집에 머물며 교회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방송국 앞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를 만나며 서울에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비가 바닥나자 결국 일을 찾아야 했고, 운 좋게 면접에 합격해 취업하게 되었다. 명절을 맞아 시골에 있던 짐을 모두 옮기며 본격적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언니 집에서 출퇴근하며 지내던 것도 잠시, 큰 다툼이 벌어지면서 갑작스럽게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정말 막막했다. 다시 시골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일단 직장 근처 모텔에 사정을 말해 일주일간 지내며 출퇴근했다. 다행히 그 무렵에는 남자친구가 있어 외롭거나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 혼자 힘으로 집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결국 할머니께 솔직히 사정을 털어놓았고, 할머니는 200만 원을 빌려주셨다. 그 돈으로 반지하 작은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더 저렴한 방도 있었지만 직장에서 너무 멀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 방이 나의 첫 자취방이 되었다.
서울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할머니 제외한 가족들에게 거의 알리지 않았지만 어느새 아빠만 빼고 모두 알아버렸고, 며칠 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는 내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삼촌에게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며 서운함을 드러내셨다. 아무리 미운 아빠라 해도, 딸 소식을 가족이 아닌 삼촌을 통해 들었다는 말을 듣고 뭐라고 할까 봐 그랬다라며 핑계를 댔다. 지금도 그 일에 대해서 미안함을 느낀다. 그 서운함이 커서 그런지 그 이후에 서로 연락을 잘 안 하게 되었다. 그때로 돌아가서 솔직하게 먼저 말한다면, 아빠와 나 사이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 후로 아빠는 술에 취했을 때만 전화를 걸어왔고, 나 역시 전화를 피하거나 잘 걸지 않았다. 잔소리가 이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예전처럼 시골집에 내려가지도 않았다.
아빠와의 서먹함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나는 서울에서의 첫 자취를 하며 일에만 매달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