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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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섭 박사의 삶의 교시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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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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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교시(敎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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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섭 시인
>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여명에
톰슨가젤이 잠에서 눈을 뜬다.
정글의 사자보다 더 빠르게
못 달리면 먹힌다는 것 예감하며.
역풍 가르며 본능적으로 질주한다.
새벽 푸른빛 일어서는 밀림에서
맹수의 제왕 사자가 깨어난다.
가젤보다 힘차게 역주하지 않으면
허기로 죽는 까닭 알고 있기에
온몸으로 해 뜨는 초원에서
가젤 앞지르는 야성을 발동한다.
그대 또한 가젤이든, 사자이든
아침 해가 뜨기 전 삶의 처소에서
열중의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역풍 속에서도 질주의 끈 팽팽하게
삶의 업보 業報 라 늦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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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정글의 여명에서 윤동주를 다시 만나다》
— 엄창섭 시인의 「삶의 교시」에 부쳐
박성진 (칼럼니스트, 윤동주 연구자)
엄창섭 시인의 시 「삶의 교시」는 야생의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생존의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윤동주 시학의 본질 — 고요한 절규, 침묵 속의 질주, 존재의 성찰 — 이 스며 있다. 이 작품은 단지 아프리카의 동물 이야기나 은유적 우화가 아니라, 철저히 하늘을 향한 인간의 고백이며, **죄와 회개의 전율을 담은 현대적 ‘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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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글의 새벽, 윤동주의 여명과 겹치다
첫 연에서 가젤이 “못 달리면 먹힌다는 것 예감하며” 달리는 모습은, 윤동주가 일제 치하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향해 전 생애를 던졌던 질주와 다르지 않다.
그 질주는 시대의 억압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양심과 진실을 향한 저항의 시학이었다.
엄창섭의 가젤은 몸을 던지고, 윤동주의 시인은 혼을 던진다. 두 존재 모두, 죽음보다 더한 침묵을 깨기 위해 뛰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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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성의 철학, 본능의 신학
사자는 “허기로 죽는 까닭을 알고 있기에” 달린다. 이는 단순한 포식 본능이 아니다.
이 질주는 철학적이다. 살기 위해 반드시 타인을 넘어야 하는 구조, 그것이 정글이고 곧 인간 사회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이 구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며 괴로워했다”*고 고백했고, 그 괴로움은 자신의 내면에 내재한 약탈자적 본성을 향한 회개의 시작이었다.
엄창섭의 사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배고픔을 향한 질주가 아니라, 선악을 아는 자의 분투로 다시 읽힌다.
이 시의 야성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신 앞에서의 인간의 발돋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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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삶의 업보'라는 종교적 선언
이 시의 마지막 연,
> “삶의 업보라 늦출 수 없다.”
이 한 구절은 신학적으로 가장 강렬한 고백이다.
‘업보(業報)’는 단지 불교적 윤회 개념을 넘어서, 각 존재가 짊어진 십자가, 즉 삶의 운명과 과업을 의미한다.
윤동주에게 시란 곧 하늘 앞에서 드리는 자기 고백이자, 생의 책임이었다.
엄창섭 시인은 그 고백을 달리는 자의 언어로 옮겼다.
‘서서 기도하는 자’ 윤동주와 ‘달리며 기도하는 자’ 엄창섭이 이 시에서 손을 맞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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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시는 윤동주 80주기에 드리는 내일의 헌시
엄창섭 시인이 이 시를 쓸 당시, 그는 아마 윤동주의 이름을 의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는 시인을 넘어 존재한다.
이 작품은 오늘을 사는 시인에게 윤동주의 혼이 다시 내린 순간이며,
정글이라는 현대 문명의 생존 전장 안에서도 윤동주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 시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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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한 줄
> 엄창섭의 「삶의 교시」는 정글의 야생을 넘어, 윤동주의 혼이 깃든 ‘하늘 아래 인간의 질주’를 되살린다. 이 시는 피식과 포식, 본능과 윤리, 숙명과 회개의 경계를 넘는 대서사시로, 윤동주 80주기에 헌정될 만한 오늘의 참회록이며 내일의 서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