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 시적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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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가상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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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글 2000회 특집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과 나누는
가상의 시적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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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의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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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정지용 시적 대화 / 각색: 박성진 시인
윤동주
선생님, 고향이 그립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대숲 너머 누이의 젖냄새가 떠오르고
맑은 날이면 푸른 산등성이가 그리움의 이름이 됩니다.
별이 쏟아지던 정지용 시인의 시처럼
제 마음도 쏟아질 듯 고요합니다.
정지용
동주야, 그대의 고향은 단지 풍경이 아니야.
그건 네 심장이지.
그리운 것은 항상 잃어버릴 듯한 것들이지.
그러나 시는 그 잃어버릴 것들을 붙잡는 그물이다.
나는 내 고향을 ‘향수’로 붙잡았고,
너는 네 고향을 ‘별’로 건져내고 있구나.
윤동주
그러나 선생님,
고향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습니다.
나라가 있어야 돌아갈 고향도 있는 법인데
우리는 지금 나라 없는 시인입니다.
정지용
그래, 나라 없는 시인...
우리는 말조차 검열당하고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것마저
하늘을 훔치는 일이 되었지.
하지만 시는, 동주야, 길을 잃지 않아.
길이 막혔다면, 우리는 시로 산을 넘는 거야.
윤동주
그 산은 너무 높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직 그 산을 넘을 언어가 없습니다.
시를 쓰는 손마저 떨리고
매일 거울 앞에 서면
누군가의 그림자가 저를 심문합니다.
정지용
거울 속에서 너를 심문하는 건
일제가 아니라 너 자신일지도 모른다.
나는 시로 길을 찾으려 했고
너는 시로 죄를 고백하려 하지.
그러니, 네 ‘참회록’은 곧 하나의 성서가 될 수도 있겠지.
윤동주
선생님, 저는 시로 별을 세고 싶습니다.
저마다 다른 고향의 등불처럼
민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습니다.
정지용
그래, 동주야.
그 별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하늘에 도착할 거다.
그 별들을 따라
잃어버린 나라의 길도,
열릴 거다.
그대의 시는 아직 어린 날의 기도 같지만,
이 시대엔 그것조차 혁명이지.
윤동주
이 시절에도 시가 길이 될 수 있다면…
저는 그 길 위에, 무릎을 꿇겠습니다.
정지용
그래, 꿇은 무릎에서 핀 시는
언젠가 목소리가 되고
다시 나라가 된다.
동주야,
너는 고요하지만
이미 들불처럼 타고 있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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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 박성진 시인의 시적 해설
이 시적 대화는 실재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으나,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현된 시대의 초상이다. 윤동주는 “길이 막힌 민족”의 청년으로서 고향의 향수를 품고, 정지용은 “언어의 시학”을 품은 선배 시인으로서 제자의 떨리는 시심을 감싸 안는다.
윤동주의 내면은 고향에 대한 순결한 사랑과 동시에 일제의 언어폭력 속에서 스스로를 심문하는 자의식의 그림자가 얽혀 있다. 정지용은 고향을 ‘향수’로 승화시키며, 윤동주의 고통을 시로 이끄는 문학적 도반이 된다.
“나라 없는 시인”이라는 고백과 “시로 산을 넘는 법”이라는 답변은, 단순한 시론을 넘어선 민족적 고뇌와 문학적 연대의 상징이다. 시의 길은 막혀 있으나, 시는 길을 연다. 이 대화는 시인들의 영혼이 시간의 경계를 넘어 나누는 가장 숭고한 동행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