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안혜초 시인의 가을이 여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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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칼럼니스트
문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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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초 시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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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여름에게
그대 이젠 그만 아쉬워하고
떠날 차비를 해요
때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또 돌아오게 되리니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더 이상 돌아보지도 말고
즐거운 여행길에 오르듯이 우울훌
가벼이 떠나가요
해 돋는 그 나라
생명이 움트는 그 나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그대 여름 내내 땀 흘려
꽃 피워낸 자리마다엔
내 진정 탐스럽고 아름다운 열매들을
알알이 맺어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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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계절을 넘어선 철학적 대화
안혜초 시인의 〈가을이 여름에게〉는 계절의 교체를 의인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가 담고 있는 사유는 단순한 자연의 변화를 넘어, 존재의 떠남과 귀환을 노래한다
노동과 결실, 그리고 무상 속에 깃든 윤회의 질서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건네는 말은 마치 계절을 초월한 철학자의 목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1. 떠남의 지혜는 "우울훌" 놓아버림에 있다
첫 연에서 “떠날 차비를 해요”라는 권유는 삶의 끝에서 집착을 놓는 태도를 시인은 표현한다. “우울훌 가벼이”라는 표현은, 노자의 ‘무위(無爲)’를 떠올리게 한다.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는 것이다
여름은 끝났지만, 그 떠남은 무가 아니라 가을의 시작을 여는 창조적 여백의 정신을 시인은 노래한다.
2. 귀환의 약속은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과 같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 다시 또 돌아오게 되리니”라는 구절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흐른다(Πάντα ῥεῖ)”를 닮았다. 떠남은 단절이 아니라 흐름 속의 한 국면이다.
여름은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을의 열매와 겨울의 씨앗 속에서 다른 형식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시인은 변화 속에서도 영속하는 법칙을 발견하고 있다.
발상이 면면히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서
본인도 모르게 철학의 시를 읊어 나간다
3. 꽃과 열매는 세대와 노동의 계승으로 보여준다
여름은 땀 흘려 꽃을 피웠고, 가을은 그 자리에 열매를 맺는다. 이 장면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와 나, 존재’의 협력처럼 읽힌다. 존재는 홀로 완결되지 않는다 앞선 존재의 노동과 존재의 수확이 서로를 이어 주어야 한다. 열매는 단순한 수확물이 아니라, 한 세대의 수고와 또 다른 세대의 희망이 교차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4. 동쪽으로 존재의 방향성을 틀었다
“해 돋는 그 나라 / 생명이 움트는 그 나라 / 동쪽으로 동쪽으로”라는 구절은 공간적 이미지를 넘어선 존재론적 선언이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자리, 시작과 희망의 자리이다. 여름이 떠나는 길은 소멸의 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는 마치 플라톤의 ‘태양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 어둠 속에서도 동쪽의 빛을 향해 걷는 것이 곧 진리의 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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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가을이 여름에게〉는 계절의 시적 대화 속에 노자의 무위,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 하이데거의
존재의 사유, 플라톤의 빛의 비유까지 겹겹이 시 속에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제 떠남은 끝이 아니라 귀환의 약속이다.
결실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문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의 계절이 끝날 때, 우울훌 가볍게 떠나라. 그것이 당신이 흘린 땀이 다음 세대의 열매로 맺힐 것이니.”
시인 안혜초 선생님의 시의 여운과 감성에 취하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