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 -정근옥 시인-타 죽는 리시얀셔스 >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화,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윤동주 시혼과 정근옥 시인의 "리시얀셔스"》



꽃의 죽음 앞에서

--폭염에 타 죽는 리시얀셔스

정근옥 문학박사


김해들판의 비닐하우스 속, 꽃잎은 숨을 헐떡거리고/

막마가 쏟아낸 폭염은 농심의 뿌리까지 타들어간다//


어둠에 찬 저녁 뉴스는 정의가 소실된 침묵을 외치고,/

언제부턴가 기만이 번들거리는 저녁강으로 흘러간다//


여의도의 그들은 꽃이 타 죽는 냄새도 모르고/

권력을 위해 검은 정장에 흰 와이셔츠, 위선을 다려 입는다//


나라 위해 목숨 걸겠다는 공약, 윤리의 탈을 쓴 허욕이었고/

민주를 버린 이념의 정치는 이제 말의 무덤 위에 군림한다//


진실, 용기는 역사를 잊은 침묵의 무덤 속에서 존재할 뿐,/

백성을 위한 목민심서에서 온전히 사라진 지 오래다//


작렬하는 여름 햇살은 축복이 아닌 고문과 죽음의 빛이다,/

열망의 꽃잎 하나가 불타며, 생의 한 시대가 무너진다//


텅 빈 약속들은 우릴 더 이상 폭염에 견딜 수 없게 하지만/

내일 다시 오를 햇살을 기다리며 낡아빠진 창을 연다//


바다 위를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꿈꾸며 푸른 하늘은 바라본다/

타오르는 땅을 힘차게 딛고 한 송이 꽃을 피우며 하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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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죽음과 윤동주의 시혼》


<생명의 숨결,

존재의 윤리>


첫 연에서 리시얀셔스가 헐떡이며 죽어가는 모습은 단순한 꽃의 소멸이 아니다

존재 전체의 절규이다. 윤동주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하듯이 꽃의 죽음은 인간의 부끄러움과 존재를 지켜내지 못한 사회의 죄책을 드러내었다. 꽃말이 ‘순수한 사랑’인 리시얀셔스가 타들어간다는 것은,

이 땅의 순수와 양심이 폭염과 무관심 속에 소멸되는 광경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는 시대의 꽃의 돌봄의 부재로 사라진 것이다


<언어의 침묵, 윤동주 ‘참회록’과의 교차>


2연의

“정의가 소실된 침묵”은 단순한 보도의 공백이 아니다. 윤동주가 「참회록」에서 “지난날 죄지은 것처럼” 고백한 그 침묵의 무게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언론의 거짓을 ‘저녁강’에 흘려보내며, 언어가 더 이상 빛이 아니라 그림자가 되었음을 고발하였다. 언어가 진실을 은폐하는 순간, 사회는 전체주의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의 침묵은 말의 결핍이 아니다

말이 배반한 그 자리를 보아야 한다.


<권력자의 위선, 부끄러움 상실의 시대>


윤동주 시인이 평생 지키고자 했던 것은 ‘부끄럼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3연에서 여의도의 권력자들은 꽃이 타 죽는 냄새조차 모른 채,

“위선을 다려 입는다.” 이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를 드러내었다.

칸트가 말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윤리적 명령은 무너졌다 권력은 꽃과 농민, 민중을 단지 수단으로 삼아 버렸다.

시인은 윤동주의 윤리적 시혼을 거꾸로 비추었다 오늘의 ‘부끄러움 상실’을 고발한 것이다.


<말의 무덤, 윤동주의 언어학적 상처>


4연의 “말의 무덤”은 윤동주 시학의 뿌리를 건드린다. 윤동주는 언어가 상처받은 시대에서 일본어로 글을 쓰며 고통스러워했다.

말은 자유와 저항을 담아야 했지만,

권력은 말 자체를 억압하고 왜곡하였다. 정근옥 시인이 묘사한 말의 무덤은, 윤동주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가 겹쳐지는 자리다.


권력의 언어는 공약의 허욕으로 변질되고, 말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니라 죽은 약속의 돌무더기다.



<망각과 기억 ‘별 헤는 밤’의 영원한 기억>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별을 헤아리며, 별을 통해 기억과 역사, 그리고 희망을 지켜내려 했다. 그러나 5연에서 “진실, 용기는 역사를 잊은 침묵의 무덤 속에” 갇힌다. 이는 별이 사라진 밤과 같다.

기억을 잃은 사회는 정체성을 잃고, 진실 없는 시대는 방향을 상실한다.

폴 리쾨르가 말했듯이 기억의 상실은 곧 정체성의 붕괴를 말한다.

꽃의 죽음은 단순한 자연의 사건이 아니다 별빛을 잃어버린 시대의 상징인 것이다.


<햇살, 축복이면서 고문,>


햇살은 생명의 근원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빛”이라 선언한다.

윤동주가 「쉽게 써진 시」에서 “햇빛처럼 튀는 웃음을 짓지 못한다”라고 고백했던 순간처럼, 햇살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에서 타자의 얼굴은 환대의 빛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햇살은 타자의 고통을 강제하는 열기다.

생명에 대한 근본적 신뢰의 붕괴이다.


<창을연 실존의 선택>


7연의 “낡아빠진 창을 연다”는 윤동주가 끝내 ‘하늘을 우러러’ 올려다보았던 결단과 닮아 있다.

낡은 창은 무너진 시대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미래의 통로다. 카뮈의 실존 철학처럼,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은 창을 열고 햇살을 맞이한다.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의지를 철저히 보여준다.


<꽃과 갈매기의 부활 윤동주의 ‘영원회귀’>


마지막 연은 하늘과 꽃으로 귀결되었다.

꽃은 불타 죽었다

다른 꽃이 이내 다시 피어난다. 이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윤동주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라고 고백하듯이 인간은 끝내 하늘을 향한다. 불타는 땅, 꽃 피우는 장면은 윤동주의 시혼이 오늘도 살아 있음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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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윤동주의 시혼과 시대적 증언》


정근옥 시인의 〈꽃의 죽음 앞에서〉는 윤동주의 시정신과 대화하는 현대적 증언 시다.

꽃의 죽음은 별의 사라짐이고, 폭염의 햇살은 시대의 부끄러움 상실이다.


언어의 무덤, 기억의 망각, 권력의 위선 속에서도 시인은 끝내 창을 열고, 하늘을 바라본다.


윤동주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부끄러움 없는 삶’은 오늘날 꽃과 농민, 그리고 약자들의 고통 속에서 다시 묻힌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죽음을 딛고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시는 인간의 영원한 회생을 노래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윤동주 시혼의 현대적 계승으로 읽힌다. 별빛의 기억과 꽃의 죽음이 교차하며, 부끄러움과 희망이 동시에 살아 있는 문학적 증언이다. 정근옥 시인의 시는 단순한 현실을 넘어, 윤동주의 정신과 철학적 사유를 현재로 불러내는 탁월한 현대시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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