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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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시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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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과 침향 沈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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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시인
가얏고마을 언덕배기에 오르면 천년을 덩실덩실 어깨춤 씰룩이게 하는 열두 줄 가락이 오동나무에서 울려 나온다
보라
어찌 천년을 살아 백성의 한恨을 달래 온 것이 오동나무를 제 혼으로 다듬어서 손가락으로 천상의 가락을 튕겨내는 악성 우륵의 가야금뿐이랴
어느 참 선비가 나라에 바친 목숨이 참나무가 되어
참나무 뿌리가 머금은 땅의 이슬방울이 글썽글썽 모인 옹달샘이 흘러내려가서 바닷물과 만나는 물 바닥 모퉁이에 제 몸에 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참나무가 분비한 점도가 높은 한恨이 침착된 수지의 나무토막을 백 년이고 천년이고 잠거 두었으니
보라
흑갈색 맵고 쓴 맛의 정기精氣가 아녀자에게 잉태를 사내에게 정력이 솟구치도록 몸을 보補하고 치유하는 명약 침향이 아니더냐
바닷물구멍에서 끄집어낸 침향을 그늘에 잘 말리어 잘게 쪼갠 조각을 향로에 놓으면 백성의 평온이 세월만큼 짙은 향기 속에 천 년 전 오동나무로 지은 우륵의 가야금 가락을 듣는 듯, 수지의 나무토막을 바닷물에 던져 넣은 사람의 영혼이 침향의 향기와 맛을 즐겨하는 듯 않느냐
보라
백성의 마음을 팔아 금을 거두고 금으로 휘두르는 팔뚝을 거느리며 우쭐거리는 사람들아
빈 뜰에 오동나무 한 그루 심을 요량이나 마음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달래기에 수지나무 몇 토막이라도 맑은 물 따라가서 바다에 부닥뜨리는 물 모퉁이에 던져 둘 요량 있느냐
숨을 헐떡거리며 자드락길을 기어오르는 사람들아
보라, 오동나무는 깊은 소리로 감쳐 심금을 울리고 참나무 수지토막은 천년의 향기로 살아 광채 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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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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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과 침향」을 읽다
서론>
전통과 치유의 시학
정순영 시인의 「가야금과 침향」은 한국 시학의 원형적 상징을 두 가지 소재로 구현한다. 오동나무의 가야금은 예술과 음악의 승화를 상징하며, 참나무의 침향은 육체와 영혼을 치유하는 향기를 의미한다.
이 두 상징을 연결한 시적 구조는 단순한 자연물의 묘사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 민족적 정서와 치유의 미학을 결합하는 거대한 서사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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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의 울림 역사적·정신적 상징>
가야금은 신라 우륵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 전통 현악기다. 시인은 "열두 줄 가락"이라는 구체적 언어로 그 악기의 원형을 제시하며, 오동나무 울림판에서 터져 나오는 가락을 통해 민족의 역사적 정서를 소환한다.
단순한 악기의 묘사가 아니라, "천년을 살아 백성의 한을 달래 온" 울림으로 재현된다.
여기서 가야금은 소리를 넘어 한의 해소, 집단적 위무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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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의 본질 --- 공명과 생명력>
오동나무는 오래전부터 악기 제작에 쓰여온 나무다.
울림의 투명성과 공명력이 뛰어나, 한국인들에게는 '소리를 낳는 나무'로 인식된다.
시인은 이를 "제 혼으로 다듬어" 악기로 변환된 존재로 묘사하며, 오동나무 자체가 영혼을 지닌 생명체임을 드러낸다.
즉, 악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나무와 인간이 결합해 만들어낸 혼의 매개물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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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와 침향 치유의 서사>
시인은 이어 참나무로 시선을 전환한다.
참나무 뿌리의 이슬, 옹달샘, 바닷물과의 만남은 유기적 흐름을 형성하며, 백 년·천년의 시간 속에서 수지가 침착해 "침향"이 된다.
침향은 실제로 동남아시아의 향목에서 얻어지지만, 시인은 이를 한국적 상징으로 끌어와 "한을 응축한 치유의 물질"로 재해석한다. 침향은 상처 입은 나무의 분비물에서 비롯되듯, 고통과 상처가 곧 치유의 근원이 된다는 역설적 진리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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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의 반복 설법적 리듬>
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보라"라는 시어의 반복이다. 이는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독자에게 시적 현장을 직접 목격하도록 초대하는 지시어다. "보라"는 감각을 깨우고, 청각과 후각, 심지어 촉각까지 환기한다. 가야금의 소리와 침향의 향기는 "보라"라는 구절을 통해 직접 체험의 차원으로 소환된다. 이는 설법이나 예언자의 음성을 연상시키며, 시를 단순한 서정시가 아닌 의식적 장면으로 격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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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의 미학 위무와 치유>
한국 시학에서 '한'은 중요한 정서적 기반이다. 억눌린 고통과 상처가 미학적으로 승화될 때, 시는 단순한 감정 표출을 넘어 집단적 공명을 낳는다. 「가야금과 침향」에서 가야금은 한을 "달래는 소리"로, 침향은 한을 "치유하는 향기"로 제시된다.
이는 예술과 의학, 정신과 육체의 이중적 차원에서 한을 풀어내는 통합적 구조다. 정순영은 한을 단순히 슬픔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것을 승화와 치유의 동력으로 전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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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영혼의 일체, 동양적 전일성>
가야금의 소리와 침향의 향기는 각각 영혼과 육체를 어루만진다.
이 둘이 함께 놓일 때, 시는 몸과 마음을 동시에 회복시키는 전일적 치유의 장을 연다.
이는 동양 철학의 특징인 "몸과 마음의 하나 됨"과 맞닿아 있다.
서구적 이원론과 달리, 동양은 상처와 치유, 육체와 영혼을 끊지 않고 이어왔다. 정순영의 시는 바로 이 전통 위에서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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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비판과 풍자의 목소리>
이 시의 백미 중 하나는 돌연 등장하는 풍자의 목소리다. "백성의 마음을 팔아 금을 거두고 우쭐거리는 사람들아"라는 대목은 단순한 미학적 서정을 넘어선 사회적 비판이다.
예술과 향기는 백성을 위로하고 치유하는데, 현실 권력은 그것을 도외시한 채 부와 권력을 탐한다. 시인은 그들에게 묻는다. "오동나무 한 그루라도 심을 마음이 있느냐, 수지토막 몇 조각이라도 던질 요량이 있느냐." 이 물음은 시인의 윤리적 선언이며,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촉구하는 강한 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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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구체성과 신화적 승화>
이 시에는 구체적 이미지들이 풍성하게 배치된다. 오동나무, 열두 줄 가락, 참나무 뿌리, 옹달샘, 바닷물, 수지토막.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단순한 묘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민족의 역사적 체험과 신화적 상징으로 격상된다. 오동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악성 우륵의 영혼이 깃든 신목이 되고, 참나무 수지는 한을 응축한 향기의 결정체로 신화화된다. 현실과 신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의 울림은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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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구조와 시적 리듬>
이 시는 음악적 구조를 지닌다. 가야금의 가락처럼 반복과 변주가 교차하며, "보라"의 리프레인(refrain)이 시적 리듬을 만든다. 가야금과 침향, 소리와 향기가 대구를 이루며 교차 반복된다. 독자는 마치 가야금 연주를 듣는 듯한 감각 속에서 시를 읽는다.
이 음악적 구조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시의 의미를 강화하는 미학적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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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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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적 시학의 성취
「가야금과 침향」은 전통과 현대, 예술과 사회, 몸과 영혼을 아우르는 통합적 시학의 성취다.
가야금은 민족의 영혼을, 침향은 치유의 정기를 상징하며, 이 둘은 한국 시학의 원형을 재현한다.
특히 '한의 승화와 치유'라는 주제는 한국 문학의 정수라 할 만하다.
동시에 현실 풍자를 통해 오늘의 사회적 문제의식을 던진다.
정순영 시인은 전통적 소재를 빌려 현대적 비판과 치유를 동시에 성취하는, 한국 시학의 새로운 문학의 정수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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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시인 약력]
1974년 《풀과 별》 추천 완료. 시집 『시는 꽃인가』, 『침묵보다 더 낮은 목소리』, 『사랑』 등 다수 출간. 부산문학상, 한국시학상, 세종문화예술대상 등 수상. 부산시인협회 회장, 자유문인협회 회장, 국제 PEN 한국본부 부이사장, 세종대학교 석좌교수 등 역임.
현재 《한국시학》 2025년 가을호(제75호)에 「가야금과 침향」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