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추분 맞이 소회
多情 이인애
백로를 지나니
한결 낮아진 체온
구름은 높고
바람이 서늘하다
기러기 하늘 높이 날아가니
찰나에 지구를 절반 돌아왔구나
봄여름 내내
작은 일에 연연하며
허둥대다 큰 것은 놓친 채
호시절 이미 멀리 사라지고
소슬바람만 내 마음 스치고 간다
비바람 천둥 번개
견디어 낸 들판
조 수수 벼 익는 냄새
고개 숙인 이삭들
은근한 겸손을 보며
옷깃을 여며 의지를 세운다
흰머리가 더 눈에 띄는
인생의 분기점에 서서
미련과 후회의 마음만 가득
서리가 내리기 전에
차분히 겨울 맞을 준비를 하리
황혼의 넉넉한 인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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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시의 출발과 계절의 전환>
이 작품은 추분이라는 절기의 정서적 울림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순간은 자연의 균형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인생의 경계에 선 존재의식을 자극한다.
시인은 단순히 계절의 변화를 서술하지 않고, 그 변화 속에서 인간의 내적 사유를 길어 올린다.
계절과 인간의 삶이 서로를 비추는 방식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첫 연에서 “백로를 지나니 / 한결 낮아진 체온”이라는 표현은 계절 변화를 신체적 감각으로 환원시킨다. 기온의 변화는 곧 삶의 열정이 식어가는 징후이자 인간 존재의 쇠락을 예고한다. “구름은 높고 / 바람이 서늘하다”라는 간결한 묘사는 전형적인 가을 풍경의 정수를 담으면서도 마음속 청명과 고독을 동시에 환기한다.
<기러기와 순환의 시간>
“기러기 하늘 높이 날아가니 / 찰나에 지구를 절반 돌아왔구나.” 이 장면은 계절의 이행과 삶의 무상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기러기는 계절의 사절이자 귀환의 존재이다.
이들의 비상은 우주적 스케일을 지닌 순환을 상기시킨다. ‘지구 절반’이라는 과장된 비유는 단순한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시간의 가속과 인생의 덧없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삶 또한 어느새 절반을 돌아온 여정임을, 한숨 섞인 통찰로 드러낸다.
<허망함과 일상의 무게>
두 번째 연은 일상의 허망함에 대한 성찰이다. “봄여름 내내 / 작은 일에 연연하며 / 허둥대다 큰 것은 놓친 채”라는 고백은 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끊임없는 분주함 속에서 본질을 잃고, 사소한 일에 매달리다 결국 중요한 가치를 놓쳐버리는 모습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화상이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청춘이 지나가듯, 인생의 황금기가 어느새 사라졌음을 시인은 절실히 느낀다.
“호시절 이미 멀리 사라지고 / 소슬바람만 내 마음 스치고 간다.” 여기서 호시절은 청춘과 전성기를 의미하며, 소슬바람은 남겨진 쓸쓸함을 은유한다.
이 대비는 삶의 무상함을 한층 선명하게 부각한다.
바람은 스쳐 지나가지만, 그것이 남기는 감각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자연의 시련과 인간의 인내>
세 번째 연에서 시인은 자연과 삶을 병치한다. “비바람 천둥 번개 / 견디어 낸 들판”은 한 해 농사의 고난을 압축한 표현이자, 인간 삶의 시련을 견뎌온 흔적을 상징한다.
시련은 곡식을 단단하게 만들듯,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단련시킨다.
이어지는 “조 수수 벼 익는 냄새 / 고개 숙인 이삭들”은 풍성한 결실과 겸손을 동시에 담는다.
농작물의 향기는 인내 끝에 맺힌 성취의 향기이며, 고개 숙인 이삭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택한 성숙의 표상이다. 인간이 배워야 할 자세를 자연의 사물이 이미 보여주고 있음을 시인은 발견한다.
<겸손과 결단의 태도>
“은근한 겸손을 보며 / 옷깃을 여며 의지를 세운다.
” 여기서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배운 교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 겸손은 단순히 고개 숙이는 자세가 아니라, 삶을 다스리는 지혜이자 의지다. 옷깃을 여민다는 표현은 추위를 준비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내적 결단을 의미한다. 추분이라는 시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을 정돈하고 다시금 의지를 다잡게 만드는 계기다.
<인생의 분기점>
네 번째 연은 자연과 인간의 삶이 직접적으로 겹쳐지는 장면이다. “흰머리가 더 눈에 띄는 / 인생의 분기점에 서서.” 추분이 낮과 밤의 경계라면, 흰머리는 젊음과 노년 사이의 경계다. 인생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분기점을 맞이한다.
시인은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인생의 전환기에 선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미련과 후회의 정서>
“미련과 후회의 마음만 가득.” 중년 이후의 인간이 흔히 느끼는 감정이자,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자각이다.
그러나 이 후회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이 고백을 통해 시인은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 이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모색한다.
<겨울을 준비하는 지혜>
“서리가 내리기 전에 / 차분히 겨울 맞을 준비를 하리.” 겨울은 노년과 죽음을 상징하지만, 시인은 두려움보다는 준비의 태도를 택한다.
인생의 종말을 부정하지 않고, 그 앞에서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하는 지혜가 드러난다. 여기에는 불안 대신 평온이, 두려움 대신 성숙이 있다.
<황혼의 의미>
마지막 구절 “황혼의 넉넉한 인생을 위하여”는 결론이자 지향점이다. 황혼은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오히려 여유와 풍요로 전환될 수 있다.
자연이 보여주는 결실처럼, 인생의 황혼도 성숙과 충만으로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시인은 무상함을 넘어, 평안한 황혼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다.
<종합적 평가>
이 작품은 추분이라는 절기를 통해 인간 삶의 주기를 비추며, 자연과 인생의 유비(類比)를 깊이 드러낸다. 기러기, 이삭, 바람, 서리 같은 이미지들은 모두 인생의 국면을 은유한다.
이 시는 허무의 탄식에서 출발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겸손과 준비, 그리고 넉넉한 황혼으로 귀결된다. 절기의 사유가 인생의 철학으로 승화되는 장면이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