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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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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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엄창섭
불멸의 영성과 거룩의 초상(肖像) 주기철 순교자의 「1944년」 그 충정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한국기독교 문인협회 고문)
아흔, 꽃비에 젖어 빛나는 어린 목숨일지라도 격랑(激浪) 속에서 깨끗한 음조의 탄주(彈奏)에 실존적 허무(虛無)로 갈가리 찢긴 육체와의 나눔은 참담한 현상 앞 창조주의 섭리 식별할 일이다.
아호 소양(蘇羊)인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혼돈의 1897년 주헌성 옹의 4형제 중 막내로 경남 웅천군(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백일리의 낮은 산자락 탯줄을 묻고, 웅천개통학교 졸업 뒤 오산학교를 거쳐 1915년 조선기독대학(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신앙적 결단으로 1년 만에 중퇴하고 낙향한 이후, 교회 활동에 전념하며 웅천교회 집사로 헌신해 ‘꿈 많은 유년 시절 소년 목사’로 불린 그 자신은 1919년 남학회 조직하고 3·1 운동에 투신한다.
‘조선의 간디’로 일컬어진 은사 조만식(曺晩植)의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 부임 요청을 수락해 1936년 산정현교회 목회자로 초빙된 직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올곧게 자기희생의 신앙 실천을 일사각오
(一死覺悟)의 말씀으로 역설한 반일투쟁과 독립정신 고취로 신사참배에 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놀라우리만치 결연한 몸짓으로 비움의 충만은 천년 중소리로 울어줄 날 푸른 바람의 선율이다.
저토록 1939년 12월 신사참배 불복의 집념에 평양노회로부터 성직 박탈되는 수모 겪으나, 끝내 지상에서 그 자신의 마지막 설교(說敎)인 1940년 2월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에서 “나는 결단코 하나님 외에 무릎 꿇고 절할 수 없다”는 말씀이 확증인 듯, 못내 비장감이 묻어 있다.
조국광복 앞둔 1944년 4월 21일 신사참배 거부로 “오호 하나님, 나를 붙잡으소서!” 담담히 미소 짓고 10년형 선고받아 혹형(酷刑)으로 복역 중 순교한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교설의 징표, 준엄한 신앙의 도전은 창조주의 끝없는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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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앙, 철학, 문학의 총체적 해석>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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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학, 신앙의 삼중주
엄창섭 교수의 글은 역사적 기록임과 동시에 시적 산문이다. 여기에는 순교의 서사, 민족사의 비극, 영성의 숭고가 동시에 담겨 있다. 우리는 이를 세 가지 층위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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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층위
일제 강점기와 기독교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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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층위
은유와 상징을 통한 순교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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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층위 순교를 통한 구원과 은총, 역사, 문학, 신학의 총체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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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의 상징 덧없음과 영원의 교차>
“아흐, 꽃비에 젖어 빛나는 어린 목숨일지라도”라는 표현은 단순한 미학적 장치가 아니다.
꽃비는 한순간 피어났다가 스러지는 생명을 뜻하며, 한국적 자연 미학과 연결된다.
그러나 여기서 꽃비는 죽음의 덧없음이 영원으로 바뀌는 순간을 암시한다. 기독교적 맥락에서 꽃비는 부활의 은유로 전환된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의 무상관(無常觀)과 기독교 신앙의 영생관이 만나 새로운 시학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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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주의 음조 고통과 찬송의 이중성>
“깨끗한 음조의 탄주”라는 문장은 음악적이다.
탄주는 악기의 연주지만, 동시에 총탄의 울림으로도 해석된다. 주기철의 삶은 찬송과 총성, 음악과 고통이 공존하는 역사였다.
혹형 속에서 그가 불렀던 찬송은 단순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시적 행위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순교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영적 교향곡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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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탲줄을 묻은 웅천의 산자락 뿌리와 정체성>
“탯줄을 묻고”라는 표현은 땅에 뿌리내린 생명의 이미지를 준다. 웅천은 주기철이 태어난 공간일 뿐 아니라, 그가 신앙과 민족정신을 동시에 체득한 장소였다.
그는 땅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자라났으며, 훗날 그 뿌리에서 흘러나온 신앙은 폭풍에도 꺾이지 않았다.
이처럼 공간적 맥락을 고려할 때, 주기철의 삶은 지역성과 영성의 교차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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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목사의 정체성, 신앙과 저항의 이중주>
주기철 목사는 “꿈 많은 유년 시절 소년 목사”라 불렸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의 신앙은 어린 시절부터 예언자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남학회를 조직하고 3·1 운동에 투신했다.
이는 곧 신앙과 민족운동이 하나로 엮였음을 의미한다. 주기철 목사는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을 민족적 저항으로 확장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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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과 산정현교회 영성의 학교>
조만식은 ‘조선의 간디’로 불리며, 비폭력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주기철이 그와 만난 것은 단순한 개인적 인연이 아니라, 사상적·신앙적 전환점이었다. 산정현교회는 단순한 교회가 아니라, 민족운동과 신앙운동의 결합체였다.
주기철은 그곳에서 민족의 독립정신과 신앙의 순수성을 함께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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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신앙 신사참배 거부의 언어>
주기철은 “나는 결단코 하나님 외에 무릎 꿇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역사적 기록임과 동시에 문학적 절창이다.
단 17자의 한 문장은 당시 조선 기독교인 전체의 신앙을 대변하는 선언이었고, 동시에 민족 저항의 압축된 시였다.
그의 올곧음은 신앙적 순결이자 역사적 저항의 정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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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설교 다섯 종목의 기원>
1940년 2월의 마지막 설교는 신학적 교리와 동시에 문학적 유언이었다.
그는 여기서 다섯 가지 기원을 통해 자신의 신앙, 민족, 가족, 교회, 후세를 향한 메시지를 남겼다.
이는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한 시대의 고백문학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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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절창 “오호 하나님, 나를 붙잡으소서”>
1944년 4월 21일, 그의 마지막 기도는 한국 기독교 문학사의 절창이다.
단 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 구원, 사랑, 믿음이 모두 담겼다.
그는 고문 속에서도 미소 지었다.
이는 고통을 초월한 영적 숭고의 미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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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의 민족사의 증언>
주기철의 순교는 단순히 교회사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민족사가 식민의 억압 속에서 어떻게 신앙으로 저항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의 죽음은 조선 기독교의 정체성을 세웠고, 동시에 한국 민족의 저항 정신을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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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의의 은유와 상징의 산문시>
엄창섭 교수의 글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꽃비”, “탄주”, “푸른 바람의 선율”은 모두 시적 장치이다.
이로써 주기철의 생애는 단순한 전기적 서술이 아니라, 산문시적 초상으로 재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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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의미 십자가 신학의 구현>
순교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정점이며, 십자가 신학의 구현이다. 주기철 목사의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은총이었다. 신학적으로 그는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렸고, 그 희생은 한국 교회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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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의미 실존과 숭고>
“실존적 허무로 갈가리 찢긴 육체”라는 표현은 하이데거적 실존철학과 맞닿는다. 그는 허무 속에서도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다.
더 나아가 그의 죽음은 칸트가 말한 ‘숭고’의 차원에 이른다.
인간의 한계를 체감하면서 동시에 자유와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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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사의 연속선 윤동주와의 비교>
윤동주가 시를 통해 저항했다면, 주기철은 순교를 통해 저항했다.
둘 다 1940년대라는 동일한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으며, 죽음을 통해 민족과 신앙을 증언했다.
두 인물은 시와 순교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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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영성과 오늘의 과제
주기철의 순교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권력 앞에서 무릎 꿇지 않는 용기, 신앙과 정의를 결합한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한다.
엄창섭 교수의 글은 그를 단순한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 있는 불멸의 영성과 거룩의 초상으로 제시하였다.
《문학박사 엄창섭》
*한국시문학회 회장
*관동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총장대행)
역임
*K- 정 나눔 이사장,
*한국기독교문인협회 고문
*신문예 고문
*월간 모던포엠 주간
*강릉중앙감리교회 원로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