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주광일 시인--- "꿈"》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꿈"


주광일 시인


깎아지른 낭떠러지 아래

까마득한 꿈이 숨어있네.

비상의 기적만이

구원의 길일뿐,

여간해선

이룰 수 없는 꿈이.

그러나 누군들 부정하리.

머잖아 어제와 다른

태양이 뜰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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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절벽의 사유, 태양의 약속


<절벽의 첫 울림, 숭고의 공간>


첫 구절은 마치 차가운 바람처럼 독자의 가슴을 후려친다.

절벽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맞닥뜨리는 실존의 문턱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벼랑 끝에 몰린다.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고, 앞으로 내디디면 추락이고, 물러서도 길이 없는 그 자리. 그러나 그 자리가 끝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강제적으로 깨어 있게 만드는 공간이다.

칸트가 말한 ‘숭고’는 바로 이곳에서 태어난다.

숭고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크기와 마주했을 때 오는 두려움이지만, 동시에 그 두려움 속에서 자유의 가능성을 맛보는 역설적인 경험이다.

주광일 시인의 낭떠러지는 바로 그 숭고의 순간을 불러낸다.

절벽에 선 자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보지 못한 하늘을 본다.

끝이라고 여겼던 자리가 새로운 시작의 문턱으로 변한다.


<숨어 있는 꿈 보이지 않는 희망>


“까마득한 꿈이 숨어있네.” 이 구절은 꿈의 본질을 드러낸다. 꿈은 언제나 눈앞에 반짝이며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곳에 감춰져 있다. 멀리, 까마득한 심연 속에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씨앗은 겨울 땅속에 숨어 있지만 봄이 오면 싹을 틔운다. 마찬가지로 꿈은 잠복하며 힘을 비축한다.

그것은 얇고 가벼운 욕망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뿌리와 같은 것이다. 바슐라르가 우물과 심연에서 인간 심성을 읽어냈듯, 시인은 낭떠러지 아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꿈을 발견한다.

꿈은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좋다.

보이지 않는 동안 더욱 단단해지고, 언젠가 빛을 향해 솟구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비상의 순간 날개를 펴는 용기>


“비상의 기적만이 / 구원의 길일뿐.” 이 구절은 마치 단칼처럼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절벽에서 구원받는 길은 단 하나, 날아오르는 길뿐이다. 그러나 날개를 펼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중력은 우리를 붙잡고, 현실은 계속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비상이다. 비상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존재의 질적인 변모다.

이전의 삶을 내려놓고, 새로운 차원을 향해 몸을 던지는 용기. 인간은 그 순간에만 자유로워진다. 이때의 비상은 외부에서 주어진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스스로 내리는 결단이다. 주광일 시인은 이 결단의 순간을 “기적”이라 부른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다시 날아오를 용기를 품을 때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


<중력과 은총 끌림과 들어 올림>


삶의 무게는 언제나 아래로 향한다.

매일 반복되는 의무, 지울 수 없는 상처, 쉽게 지워지지 않는 후회가 우리를 끌어내린다. 시모네 베유는 이를 ‘중력’이라 불렀다.

그러나 인생에는 중력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우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 그것은 우리가 요청하지 않아도 다가오는 힘이다. 은총이다.

절벽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와, 우리를 더 이상 주저앉히지 못하게 만든다. 은총은 우리의 힘으로 조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수동적인 경험만도 아니다. 은총은 기다림과 준비, 깨어 있음 속에서 다가온다. 스스로 일어나려는 의지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이 만나, 비상은 가능해진다.


<불가능의 고백 좌절을 껴안은 희망>


“여간해선 / 이룰 수 없는 꿈이.” 이 구절은 차갑게 들린다.

그러나 정직하다.

희망을 값싸게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이 얼마나 힘든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지를 먼저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인식은 희망을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을 더욱 깊게 한다. 쉽게 이룰 수 있는 목표는 쉽게 잊힌다.

그러나 불가능에 가까운 꿈은 인간을 끝까지 붙잡는다. 블로흐가 말한 희망은 바로 이런 것이다.

희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불가능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다.

주광일 시인의 시는 포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냉철하게 현실의 장벽을 본다.

그 정직함 속에서 희망은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절망과 희망의 경계, 낭떠러지의 이중성>


낭떠러지는 끝인가, 시작인가. 이 질문 앞에서 시인은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다. 벼랑은 언제나 추락의 위험을 품는다.

그러나 동시에, 날아오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절망과 희망은 낭떠러지라는 한 자리에 공존한다. 절망을 끝으로만 본다면 낭떠러지는 무덤이다.

그러나 그 절망을 딛고 나아가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끝과 시작이 겹쳐 있는 공간, 그것이 낭떠러지다.

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고, 다시 길을 열어준다.


<반문 속의 위로와 인간 보편의 진실>


“그러나 누군들 부정하리.” 이 반문은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절벽 앞에서의 공포와 좌절은 개인의 경험이지만, 새로운 태양을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희망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희망을 부정한다고 말할 때조차, 마음속 깊은 곳에는 다시 빛을 기다리는 본능이 살아 있다. 이 반문은 그 본능을 깨운다.

그래서 시인은 명령하지 않고, 다만 조용히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은 곧 독자의 대답으로 이어진다.


<태양의 약속 다른 아침의 빛>


“머잖아 어제와 다른 / 태양이 뜰 것임을.” 태양은 매일 떠오른다. 그러나 오늘의 태양은 어제와 다르다.

빛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맞이하는 나의 존재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절망을 견뎌낸 자만이 새로운 아침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같은 태양이라도, 어제의 시선으로는 보지 못했던 빛을 오늘은 본다. 그것이 바로 새 태양이다.

시인은 물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빛, 마음의 새벽을 노래한다.


<존재의 새벽 시간의 변주>


태양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지만, 이 시에서의 태양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존재의 새벽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더욱 눈부시다.

절망을 오래 견딘 자만이 새 태양을 새롭게 맞는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이다. 카이로스, 곧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도래하는 순간. 주광일 시인의 태양은

그 시간의 문을 열어놓았다.


<절제된 언어의 힘 여백의 미학>


시인은 화려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제된 단어들만으로도 강렬하다. ‘낭떠러지, 꿈, 기적, 구원, 태양.’ 다섯 개의 단어가 기둥처럼 시를 세운다. 독자는 그 기둥 사이에 자기 이야기를 불러 넣는다. 언어의 절제가 여백을 낳고, 그 여백은 독자의 사유를 부른다. 그래서 이 시는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독자와 동행하며 함께 걷는 시>


이 시는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다. 읽는 순간, 독자는 시인과 함께 절벽 앞에 선다.

시인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당신은 새로운 태양을 부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독자를 시인의 길 위로 초대한다.

독자는 스스로 대답하며, 그 대답이 곧 희망의 고백이 된다.

시는 이렇게 독자와 함께 걷는다.


<구원의 시학 은총과 결단의 합주>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은총처럼 다가오는 힘과 스스로의 결단이 만나는 순간, 구원은 이미 시작된다.

절망 속에서도 날개를 펴는 순간, 우리는 비상을 경험한다.

은총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결단은 인간 안에서 솟아난다.

두 힘이 만날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

주광일 시인의 시는 그 긴장을 짧은 언어 속에 압축한다.


<마지막 숨결 어제와 다른 태양을 향해>


마지막 구절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속삭인다. 머잖아, 어제와는 다른 태양이 뜰 것이다.

절망을 끝까지 견딘 이에게만 보이는 빛, 어둠을 끝내 건너온 이에게만 허락되는 아침을 맞는다.

이 시는 짧지만,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숨 쉬는 인간적인 증언이다.

어제와 다른 태양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내 안에서 다시 불붙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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