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시답지 않은 사람, "웃고 싶어서"》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안혜초 시인 시 원문


시답지 않은 사람,

"웃고 싶어서"


그러셨다는군요


창조주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Poem이라고 하셨다는군요


詩처럼 살라

하시면서요


그래서 시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을


시답지 못한 사람

시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는 건지요.


*********



<창조와 시의 기원>


이 시의 출발점은 창조의 순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기원을 흙과 숨결의 은유로 기억한다.

성경 창세기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전혀 다른 비유를 꺼내든다. “Poem이라고 하셨다는군요.” 인간은 단순히 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 비롯된 존재라는 선언이다. 말씀(Logos)

으로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신학적 진리를, 시인은 시(Poem)라는 단어를 통해 새롭게 조명한다. 이는 인간 존재를 생물학적 차원이 아닌, 언어적·시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혁명적 상상력이다. 인간은 단순한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의 시적 발화 속에서 탄생한 존재다.



<Poem이라는 호명의 신비>


여기서 등장하는 ‘Poem’은 문학 장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호명의 순간이다.

철학자 알튀세르가 인간을 ‘호명된 주체’라 한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Poem’으로 부르셨다.

이 호명은 단순한 이름 짓기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언어적 사건이다. “너는 시다.”라는 부름 속에서 인간은 곧 살아 있는 시가 된다. 따라서 삶은 시의 한 행이며, 각자의 인생은 창조주의 거대한 시편 속에 기록된 단어다.

이는 인간을 단순한 생존자가 아닌 시적 존재자로 새롭게 세운다.



<“시처럼 살라”는 명령>


“詩처럼 살라”는 구절은 단순한 미학적 권유가 아니라 존재론적 명령이다.

시처럼 산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답게 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시가 지닌 본질은 압축 속의 진실, 언어의 순결, 울림과 감동을 삶의 양식으로 삼으라는 요청이다.

인간은 기계처럼, 혹은 동물처럼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그는 시적 울림을 남기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이 명령은 인간에게 부여된 정체성과 존엄을 동시에 드러낸다.



<시와 철학의 경계>


철학은 진리를 이성적으로 탐구하고, 시는 진리를 직관과 상징으로 드러낸다.

이 시는 철학보다 시를 더 근원적인 차원에 둔다. 왜냐하면 철학이 언어를 통해 사유하듯, 시 또한 언어를 통해 존재를 밝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시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인간은 곧 시적 언어 속에서 거주하는 존재다. 이 시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철학적 동물이기 이전에, 그는 시적 동물이다.



< ‘시답다’의 언어학적 모순>


‘시답다’라는 한국어 표현은 매우 흥미롭다. 긍정적으로는 “시다운 것”을 뜻하지만, 부정적으로는 “시시하다, 별 볼 일 없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시인은 이 언어의 양면성을 전복적으로 활용한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에게 “시답게” 살라 하셨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은 “시답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언어적 모순은 곧 존재적 모순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긍정의 언어가, 인간의 타락 속에서 부정의 언어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신 앞에서의 실패>


“시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히 예술적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창조주 앞에서 본래의 부름을 배반한 자다. 시답게 살라는 명령을 잊고, 탐욕과 무기력, 불의와 무관심에 매몰될 때 인간은 더 이상 시가 아니라 산문이 된다. 산문적 삶은 질서와 기능만 남고, 울림과 아름다움이 사라진 삶이다. 시인은 이를 존재론적 실패로 고백한다.

인간은 시답게 살지 못할 때, 곧 하나님 앞에서 시답지 못한 존재가 된다.



<자기 성찰과 실존적 부끄러움>


“말하게 되는 건지요”라는 마지막 물음은 독백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실존적 고백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향한 물음이며, 동시에 독자를 향한 질문이다. 인간은 본래 시답게 살도록 부름 받았으나, 현실 속에서는 시답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 간극 속에서 인간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본래적 삶으로 돌아가려는 실존적 각성의 신호다.



< 웃음의 역설>


흥미로운 것은 부제 “웃고 싶어서”다. 무겁고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끝내 시인은 웃음을 희망한다. 이 웃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가벼움이 아니라, 존재를 긍정하는 힘이다.

니체는 ‘위버멘쉬’가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자라고 하였다. 웃음은 절망과 죄책을 넘어서는 힘이며, 동시에 시적 존재의 회복이다.

시인은 웃음으로써 다시 시답게 살아가려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시적 인간학의 선언>


이 작품은 인간학적 선언을 품고 있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 정치적 동물이라는 정의보다, 본질적으로 시적 동물이다.

그는 창조주의 언어에서 비롯되었고, 언어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언어로 삶을 기록한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은 곧 시적 존재다. 인간이 경제와 권력의 세계에만 매몰될 때, 그는 본래의 정체성을 잃는다.

시인은 “너는 Poem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인간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시와 윤리적 삶>


시답게 산다는 것은 곧 윤리적 삶을 의미한다.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진실을 직시하는 언어다. 따라서 시답게 산다는 것은 거짓을 거부하고, 정의와 선을 추구하며, 타인을 위로하는 삶이다. 시답지 못한 삶은 곧 비윤리적 삶이다.

인간은 시로 불렸기에, 그 삶 또한 시적 울림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시와 윤리를 연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과 탁월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목적을 에우다이모니아라 했다.

이는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덕을 실천하며 탁월성을 실현하는 삶이다. “시처럼 살라”는 명령은 바로 이 탁월성을 향한 요청이다.

삶이 시적이지 않다는 것은 곧 탁월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시적 삶은 무절제와 탐욕이 아니라, 절제와 조화를 통해 완성된다. 인간은 탁월성 속에서만 본래적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시의 신학적 의미>


이 작품은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신학적 선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살아 있는 시이며, 그 삶은 곧 신의 시편에 기록된 구절이다. 시답게 산다는 것은 곧 신앙의 길이다.

믿음이 없는 시는 공허하고, 시가 없는 믿음은 메말라 있다. 시와 신앙은 하나의 길에서 만난다.

하나님은 시를 통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은 시를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결론>

하나님, 인간, 그리고 시


결국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시답게 살고 있는가?” 창조주는 인간을 Poem이라 부르셨지만, 오늘 우리의 삶은 욕망과 무기력 속에서 그 이름에 합당한가. 인간은 본래 시로 태어났으나, 현실 속에서는 산문처럼 살아간다.

이 간극을 메우는 길은 다시 시답게 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쓰신 위대한 시의 한 행이며, 매일의 삶을 시답게 살아낼 때 본래의 존엄을 회복한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깨워주고 있다.


푸르름 한 줌 이상을

일깨워주는 시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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