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주광일-아소산의 석양》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아소산의 석양


주광일 시인


1년 만에 다시 찾아온

아소산 다카모리고원,


푸른 하늘

흰구름을 빼고 나면


나를 반기는 건

억새풀들 뿐이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억새풀들이

정감 어린 미소와 함께

온몸을 흔들며

도열해 있었다.


가을 잠자리 떼 아래로

꽃사슴이 뛰어다니는 아소산.


저물녘 석양의 뒷모습이

무정한 세월에 속절없이

늙어버린 내 처지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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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억새와 석양에 깃든 사유의 위로


이 시는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자연과 인간의 내면적 교차가 어떻게 위안의 형태로 다가오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아소산의 고원이라는 공간은 시인에게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비추어보는 영적 거울로 기능한다.


첫머리에서 “푸른 하늘 / 흰구름을 빼고 나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날씨 묘사가 아니다. 일상적이고 전형적인 자연의 배경을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은 억새 풀 뿐이라는 인식은, 인간 삶에서 본질을 마주하는 순간의 깨달음을 상징한다. 화려한 구름과 청명한 하늘은 장식적 요소일 뿐, 결국 나를 맞아주는 것은 억새라는 소박한 존재라는 점에서 삶의 본질이 화려함이 아닌 단순함과 순수함에 있음을 드러낸다.


억새풀의 이미지는 중요한 상징이다. 그것은 바람결에 흔들리며 동시에 뿌리를 굳건히 박고 서 있는 존재다. 시인은 억새를 통해 삶의 유연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감지한다. 특히 “정감 어린 미소와 함께 / 온몸을 흔들며 / 도열해 있었다”라는 구절은 억새를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의인화된 존재로 그려내며, 시인 자신을 맞이하는 동행자이자 위로자로 자리매김한다. 자연은 침묵 속에서도 인간에게 따뜻한 교감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잠자리 떼와 꽃사슴은 생명력과 활력을 상징한다. 이는 억새가 보여준 정적인 위로와는 대조적이다. 하늘을 나는 잠자리와 달리는 사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순환하는 자연의 생동감을 보여주며, 세월 속에 늙어가는 인간과 대비된다. 그러나 이 대비는 비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유한한 생은 무한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 한 조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석양을 마주한다. “무정한 세월에 속절없이 늙어버린 내 처지”라는 고백은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쇠락을 인정하는 진솔한 목소리다. 하지만 석양은 단순한 슬픔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위로해주고 있었다”라는 마무리에서 보듯, 석양의 붉은빛은 삶의 노을을 받아들이는 평화로운 태도로 변환된다. 늙음이 곧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의 안식을 열어준다는 성찰이 담겨 있다.


이 시는 자연의 장엄함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투사하면서도, 결국 그 나약함마저도 품어주는 자연의 자비로움을 포착한다. 억새의 미소, 잠자리의 비행, 사슴의 질주, 그리고 석양의 위로는 모두 ‘세월의 무정함’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품고 있으나, 그것을 고통이 아니라 ‘공감과 위안’으로 바꾸어내는 데에 시의 미학이 있다.


즉, 「아소산의 석양」은 늙음과 쇠락을 자연과 화해시키는 시적 장치로서, 독자로 하여금 석양의 장엄함 속에 내면의 평안을 발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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