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다정-이인애 시인 - "밤 줍기"》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밤 줍기

多情 이인애 시


한가위 문턱에 낮달이 떠 있다

가을을 줍줍 하는 자드락길


설렘으로

초로의 옷을 벗어던지고

초록빛 옷으로 갈아입은 마음


덤불숲에 숨긴 보물 찾아 헤매며

슬픔을 덜어내고

웃음을 줍는 시간


햇살의 정기를 듬뿍 받은

토실한 알밤 한 알에

우주를 들어 올리는 기쁨


손에 움켜 쥔 행복 한 아름

어느결 보름달이 몰래 찾아와

귀에 걸린 내 입술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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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가을의 시학과 인간 존재의 회수


<낮달과 한가위의 시적 문턱>


시의 서두는 낮에 떠 있는 달로 시작된다. “한가위 문턱에 낮달이 떠 있다”라는 시구는 일상의 풍경 속에서 낯선 기호를 제시한다. 달은 본래 밤의 상징이지만, 낮에 떠 있는 모습은 경계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현상이 아니라, 풍요와 덧없음,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얽혀 있는 인간 삶의 은유다. 시인은 이 낮달을 통해, 한가위를 앞둔 시간적 문턱을 알리고, 계절과 존재의 전환기를 동시에 시각화한다.


<자드락길과 가을 줍기의 행위성>


“가을을 줍줍 하는 자드락길”은 언어적으로도 리듬감 있는 표현이다. ‘줍줍’이라는 구어적 어감은 아이 같은 천진함을 담으면서도, 계절의 산물을 거두는 성실한 행위를 포착한다. 자드락길은 농촌의 작은 오솔길을 의미하며, 그 길 위에서 벌어지는 행위는 단순히 열매를 줍는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이어가는 풍속이며, 마음의 결핍을 채우는 정서적 활동이다. 여기서 시인은 가을의 길을 단순한 길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를 수확하는 ‘심상의 길’로 제시한다.


<설렘과 옷의 환복>


“설렘으로 / 초로의 옷을 벗어던지고 / 초록빛 옷으로 갈아입은 마음”은 계절의 전환을 의복의 은유로 표현한 대목이다. 초로(이슬)는 하루의 아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노년과 쇠락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 옷을 벗어던지고 초록빛으로 갈아입는 것은, 늙어가는 계절 속에서도 다시 생명을 되찾으려는 내면의 환생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계절 변화를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새롭게 단장하는 영적 체험의 과정으로 읽힌다.


<숲 속 보물과 웃음의 회수>


“덤불숲에 숨긴 보물 찾아 헤매며 / 슬픔을 덜어내고 / 웃음을 줍는 시간.” 여기서 덤불숲은 어둠과 혼란, 인생의 난관을 상징한다. 그 속에서 보물을 찾는 행위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상실 속에서도 잃어버린 기쁨과 웃음을 되찾으려는 내면적 탐구다. 웃음을 줍는다는 표현은 행복이 외부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능동적으로 회수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시인은 가을 숲을 ‘잃어버린 희망의 저장소’로 제시하며, 그 안에서 웃음을 다시 채집하는 인간의 힘을 노래한다.


<햇살과 알밤의 우주적 상관>


“햇살의 정기를 듬뿍 받은 / 토실한 알밤 한 알에 / 우주를 들어 올리는 기쁨.” 여기서 알밤은 자연의 산물 그 이상이다. 작고 소박한 알밤 한 알이 곧 우주적 의미를 품는 그릇으로 변한다. 이는 동양적 사유에서 흔히 발견되는 사소한 것 속의 무한, 미시적 세계 속의 거시적 질서를 떠올리게 한다. 알밤 한 알에 우주를 들어 올린다는 과장은, 사실은 시인의 직관이다. 인간은 작은 사물 속에서 전체의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우주와 교감한다.


<손에 잡히는 행복의 구체성>


“손에 움켜 쥔 행복 한 아름”은 행복의 물질화를 보여준다. 행복은 추상적이지 않고, 직접 손에 잡히는 구체적 체험이다. 삶의 기쁨이란 거대한 성취나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소소한 계절의 열매와 같은 일상에서 체험된다. 이 순간 시인은 행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과 함께 손에 담아내는 공존적 기쁨을 노래한다.


<보름달의 은밀한 출현>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결 보름달이 몰래 찾아와 / 귀에 걸린 내 입술에 앉아 있다.” 보름달은 풍요와 충만의 궁극적 상징이다. 그러나 이 보름달은 하늘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의 몸에, 더 구체적으로는 귀와 입술에 스며든다. 이는 자연의 풍요가 인간의 감각 속으로 내재화되는 장면이다. 달빛이 귀에 걸린다는 이미지는, 우주가 인간의 청각과 발화 기관을 통해 새롭게 울려 퍼진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낮달과 보름달, 시작과 끝의 원환>


시의 구조는 낮달로 시작해 보름달로 끝난다. 낮달은 불완전한 달, 미완의 상징이고, 보름달은 충만과 원만의 상징이다. 시인은 낮달에서 출발해 보름달에 도달함으로써, 인간의 삶이 불완전에서 충만으로, 결핍에서 회수로 나아감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가을의 풍경 묘사가 아니라, 삶의 근본적 변증법을 담아낸다.


< 한국적 풍습과 공동체적 기억 >


밤 줍기는 한국 농경 사회의 오래된 풍습이다.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모여 삶의 풍요를 나누는 의례적 행위다. 시인은 이 행위를 개인적 서정으로 끌어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 의미를 불어넣는다. 즉, ‘밤 줍기’라는 작은 풍습은 곧 인간이 삶을 회수하고, 잃었던 웃음을 찾으며, 행복을 손에 담는 행위로 확장된다.


<자연과 인간의 호흡>


시 전체는 자연과 인간의 호흡으로 짜여 있다. 낮달, 자드락길, 숲, 알밤, 보름달로 이어지는 이미지들은 모두 자연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 감정과 존재의 의미를 담아내는 매개체로 전환된다. 이는 곧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교감하며 함께 세계를 이룬다는 사상적 진술이다.


<언어의 투명성과 시적 맑음>


이인애 시인의 언어는 과도한 장식이나 수사가 없다. 오히려 간결하고 투명하게 계절과 존재의 교감을 담아낸다. “줍줍,” “토실한,” “몰래” 같은 단어들은 시어의 구체성과 친근함을 높이며, 독자가 시적 상황 속으로 바로 들어가게 한다. 이는 시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내면의 깊이를 확장시킨다.


<우주와 인간의 알레고리>


작은 알밤 속에서 우주를 들어 올리고, 작은 웃음 속에서 행복을 체화하는 과정은 곧 인간 존재의 알레고리다. 인간은 거대한 것을 소유할 수 없지만, 작은 것을 통해 무한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가 보여주는 세계의 방식이며, 인간의 삶이 추구해야 할 미학적 태도다.


<총평>

충만의 시학


결국 "밤 줍기"는 작은 열매와 작은 길에서 출발하여, 달과 우주에 이르는 서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시인은 삶의 기쁨이 외부의 거대한 성취가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회수에서 비롯됨을 말한다. 낮달과 보름달, 웃음과 행복, 알밤과 우주는 서로 맞물려, 인간이 계절 속에서 충만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인애 시인의 작품은 단순한 계절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희망과 충만을 선언하는 보편적 서정시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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