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노인의 백수가 미래다?》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철학적 에세이>


<백수가 미래다>

소크라테스에서 코로나 이후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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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가>



<문제 제기의 서두부터--

백수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


인류는 언제나 ‘노동’을 삶의 기초로 여겨왔다. 밭을 갈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며,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일까지 노동은 곧 생존과 동일시되었다. 직업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곧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과 같았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이 오래된 등식을 단번에 흔들어 놓았다. 직장이 문을 닫고, 일상이 정지하자 인류는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가?”


이 질문은 특히 노년층에게 절실하다. 오랜 직장 생활 뒤 퇴직한 이들은 곧 ‘백수’라는 이름을 얻는다. 한국 사회에서는 ‘백수’가 곧 낙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낙인 속에 새로운 가능성이 숨어 있다. 직업이 없는 상태야말로 오히려 자유와 창조의 조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 철학적 담대함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백수야말로 미래다.”



<소크라테스와 직업 없음의 위대함>


고대 아테네의 소크라테스를 떠올려 보자. 그는 장사꾼도, 장인도, 정치인도 아니었다. 그에게 고정된 직업은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아테네 광장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살았다. 겉보기에 그는 무직자였다. 그러나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무직은 무능이 아니라 자유였다. 그는 먹고사는 생계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과 영혼에 대한 질문에 몰두했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명제는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를 향한 물음이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특정 직업에 묶여 있었다면, 그의 철학은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그는 ‘백수 철학자’였다. 하지만 바로 그 백수성 덕분에 그는 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노후 위인들의 삶에서 배우다>


노년기의 위대한 인물들 역시 직업이 아닌 창조의 길을 걸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귀족 작가였으나, 노년에는 모든 명예와 재산을 내려놓고 농민들과 어울리며 영적 글쓰기에 몰두했다. 그는 더 이상 ‘직업 작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남긴 「부활」과 종교적 사상은 오히려 인류적 가르침으로 빛났다.


한국의 이어령 선생도 마찬가지다. 그는 학계와 언론계를 떠난 이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오히려 더 맑고 깊은 사유를 꽃피웠다. ‘죽음 앞의 지성’은 직업인의 저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의 고백이었다. 위대한 창조는 직업이 아니라, 오히려 직업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가능했다.



<근대 자본주의와 노동의 굴레>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는 노동을 인간의 의무로 고착시켰다. 노동하지 않는 이는 무능력자로 낙인찍혔고, 직업은 사회적 계급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근대적 발명품일 뿐, 인류 보편의 진리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시민은 노동을 경멸했으며, 중세 수도사들은 ‘기도와 사색’을 최고의 삶으로 보았다.


따라서 직업의 존재라는 등식은 특정 시대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동력을 파는 기계가 아니라, 노래하고, 사랑하며, 꿈꾸는 존재이다 자본주의의 굴레가 약화될수록, 인간은 오히려 본래의 자유로 돌아간다.



<코로나 이후, ‘일’의 재정의>


코로나 팬데믹은 전 세계인에게 강제로 ‘멈춤’을 명령했다. 공장이 멈추고, 학교가 닫히고, 수많은 직장이 재택근무로 바뀌었다. 그 순간 사람들은 깨달았다. “일하지 않아도 지구는 여전히 돈다.” 물론 경제적 불안과 실직의 고통도 컸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경험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기 성찰과 배움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노동은 과연 삶의 절대 조건인가? 아니면 수많은 삶의 조건 중 하나일 뿐인가? 코로나는 이 질문을 인류에게 남기고 떠났다.



<기본소득과 경제적 안전망>


만약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백수의 삶은 불행이 아니라 해방이 된다. 직업을 통한 생존이 아닌, 존재 자체로 존엄을 인정받는 삶이 가능하다. 기본소득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다. 그것은 백수의 철학적 정당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다.


우리는 종종 게으름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게으름을 낳기보다는 오히려 창조와 돌봄, 나눔을 활성화할 수 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배우고, 나누고, 창조하며 살아간다. 기본소득은 그러한 본성을 가능하게 한다.



<백수의 철학 자유로운 존재>


백수는 결핍의 언어가 아니라, 해방의 언어다.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 가능해지는 상태다. 직업적 신분으로 나를 정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일.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는 대기업 회사에 다닌다”라고 자기소개해 왔다. 그러나 미래에는 “나는 생각한다, 나는 창조한다, 나는 관계를 맺는다”라는 식의 자기 정의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백수의 철학이다.



<노년층 백수의 의미>


퇴직 후 노년의 삶은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시기다. 더 이상 생계의 압박이 크지 않고, 오랜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이 시기에 백수로 산다는 것은 무력함이 아니라, 지혜의 개화다. 손자와 함께 책을 읽고, 오래된 친구와 대화하며, 여행길에서 낯선 풍경을 마주하는 일은 직업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노년층의 백수는 단순히 개인의 행복을 넘어, 사회적 자산이다. 그들이 남긴 기억과 지혜는 후세대에 전해져야 할 귀중한 자본이다.



<동양 철학과 무위(無爲)의 사상>


노자의 도덕경은 “무위자연”을 최고의 삶으로 제시한다. 억지로 애쓰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삶이야말로 가장 지혜롭다. 이는 곧 백수적 삶과 통한다. 노동과 경쟁으로 소모되는 삶 대신, 자연 속에서 존재 그 자체로 빛나는 삶.


장자는 또 말한다. “쓸모없음이 오히려 쓸모 있다.” 큰 나무가 목재로 쓰이지 않는 것은 너무 크고 비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덕분에 오래도록 그늘을 드리운다. 백수 또한 마찬가지다. 직업 세계에서 ‘쓸모없다’는 낙인을 받지만, 오히려 그 자유로움 속에서 더 큰 쓸모를 드러낼 수 있다.



<서양 철학과 노동 비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시민을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자로 보았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참여와 철학적 사유였다. 마르크스 역시 ‘노동 소외’를 비판하며, 언젠가 인간이 생존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결국 동서양 철학 모두, 직업에 묶이지 않는 삶을 인간의 이상으로 바라봤다. 백수의 철학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사유의 깊은 전통 위에 놓여 있다.



<코로나 이후 삶의 풍경>


코로나 이후 사람들은 직업이 아닌 삶의 다양한 형태를 살아내고 있다. 재택근무자는 일과 가정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했고, 은퇴자들은 온라인 강의나 봉사활동을 통해 새로운 자기실현을 시작했다.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냐”보다 “나는 어떤 관계 속에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코로나는 직업 중심적 삶에서 관계 중심적 삶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했다.



<경제와 철학의 역설>


많은 이들은 백수가 늘어나면 경제가 무너진다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기술 발전과 자동화는 원래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계가 노동을 대신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다.


경제의 위기가 아니라, 경제의 진보다. 소득 재분배와 기본소득만 잘 구축된다면, 백수의 확산은 새로운 문명의 징후다. 노동의 종말은 곧 창조의 시작이 된다.



<노후와 행복의 조건>


노년기의 행복은 직업이 아니라 안정과 존엄에서 온다. 최소한의 생활비, 의료, 주거가 보장된다면, 노년은 가장 풍요로운 백수의 시간이 된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신이 평생 못 했던 배움과 취미에 몰두할 수 있다.

“무엇을 더 성취해야 한다”가 아니라,

“이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가

노년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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