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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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저녁, 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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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구 시인
가을 저녁 별빛이 떠오른 들판처럼
우리의 마음도 황금으로 물들고
추석은 찬란한 시간의 숨결이 되어
모든 것이 둥글고 넉넉한 꿈으로 피어
한 해의 땀방울이 익어가는 저녁
송편 속 달을 반으로 접어
우리의 마음을 서로 나누면
그 안에서 사랑은 다시 둥글다
풀벌레의 기도가 들리는 시간
묵은 사연들은 달빛에 씻겨나가고
조상은 별빛으로 내려와
우리의 밥상 위에 함께 계신다
오늘의 달은 어제의 조상 같고
오늘의 우리는 내일의 조상이다
한가위, 이 둥근 시간 속에서
모든 생이 서로에게 감사로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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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둥근 달빛 아래의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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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구 시인의
〈가을의 저녁, 한가위〉에 대한 심층 문학비평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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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저녁’이라는 철학적 순간
전홍구 시인의 시는 명절의 정경을 그리는 단순한 감상 시가 아니다.
그는 “가을 저녁”이라는 시공간을 인간 존재의 근원적 성찰의 장으로 확장한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삶의 결실을 뜻하고, ‘저녁’은 하루의 종착지이자 내일을 잉태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이 시의 첫 행은 단순한 계절적 묘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윤회적 위치를 은유한다.
“가을 저녁 별빛이 떠오른 들판처럼 / 우리의 마음도 황금으로 물들고"---
이 장면은 자연과 인간의 내면이 동시적으로 성숙하는 장면이다.
별빛은 하늘의 기억, 황금빛은 땅의 열매다.
하늘과 땅, 초월과 현실, 시간과 영혼이 교감하는 이 순간은, 동양적 ‘조화의 철학’을 함축한다.
이 구절은 마치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를 세던 시적 시선처럼, 별빛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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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다는 말 동양미학의 정수>
시의 구조를 지배하는 중심 사상은 ‘둥글다’라는 단어다. 궁금은 원형의 아름다움이자, 불교적 완전성, 유교적 조화, 도가적 무위
(無爲)의 상징이다.
“송편 속 달을 반으로 접어 / 우리의 마음을 서로 나누면 / 그 안에서 사랑은 다시 둥글다.”
이 한 구절은 인류의 윤리학을 함축한다.
반으로 나누면 잃을 것 같지만, 나눔은 오히려 완전함을 회복한다.
이는 서양의 데카르트적 이분법(나와 너, 주체와 객체)을 넘어서는 동양적 ‘공존의 철학’이다.
‘둥글다’는 물리적 형상이 아니라 정신의 구조다.
달, 송편, 밥상, 마음, 이
네 가지가 하나의 원으로 닫히며 ‘공동체적 세계관’을 완성한다.
불교의 원상(圓相) 개념처럼, 이 둥근 세계는 생멸과 윤회를 품는다.
인간은 모난 욕망을 버리고 원으로 회귀할 때 비로소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시인은 바로 그 ‘회귀의 지점’을 한가위의 달빛으로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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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과 우주 삶의 신성화>
“조상은 별빛으로 내려와 / 우리의 밥상 위에 함께 계신다.”
이 장면은 시의 정서적 정점이다.
여기서 밥상은 단순한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생명의 제단이다. 시인은 초월적 존재를 일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밥상’은 노동의 결실이며, 가족의 공동체 공간이며, 기억의 장이다.
그 위에 조상이 앉아 있다는 것은, 제사의 의식이 아니라 기억의 윤리학이다.
이는 “신은 일상 속에 깃든다”는 한국적 종교관의 표현이기도 하다. 조상은 하늘이 아니라, 우리의 식탁 위에서, 우리의 호흡 속에서 살아 있다.
그는 초월자가 아니라 동반자이며, 이 만남의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는 공명한다.
이 구절은 유교의 제사 문화, 불교의 윤회 사상, 샤머니즘의 조상신 신앙을 한 문장 안에 녹여낸다.
전홍구는 신앙을 말하지 않고도 신성을 복원한다. 그것이 이 시의 가장 큰 미학적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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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윤회>
“오늘의 우리는 내일의 조상이다.”
이 한 줄은 시 전체의 철학적 핵심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선형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둥근 순환 속에서 연결된다.
시인은 인간을 ‘시간의 한 점’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세대의 기억이자, 윤회의 일부다.
‘오늘의 우리는 내일의 조상이다’라는 깨달음은 존재의 윤리다.
우리는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자식에게 모범을 보이며, 그 순환의 고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이 개념은 현대 문명 속에서 잊힌 ‘공동체적 시간관’을 되살린다.
서양의 시간은 직선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며, 발전과 진보를 추구한다.
그러나 동양의 시간은 원이다
그 반복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생멸 속에서 순환을 본다.
이 시는 바로 그 ‘순환적 시간의 복원’을 문학적으로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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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의 감각적 공명>
시인은 단지 철학적이지 않다. 그는 감각의 시인이다.
“풀벌레의 기도가 들리는 시간 / 묵은 사연들은 달빛에 씻겨나가고”의
이 구절은 자연의 소리를 인간의 내면과 동일한 층위로 끌어올린다.
‘풀벌레의 기도’는 자연의 언어이며, 동시에 인간의 속삭임이다.
전홍구 시인에게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존재의 언어다.
‘묵은 사연들이 달빛에 씻겨나간다’는 표현은 정화의 은유다.
달빛은 단지 조명이 아니라, 마음의 세례다.
인간은 달빛 속에서 죄와 번민을 씻고, 새로운 내일의 윤회를 준비한다.
이 장면은 기독교의 세례, 불교의 참회, 도교의 청정이 하나로 합쳐진 인간학적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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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존재론의 관계로 완성되는 생>
“모든 생이 서로에게 감사로 맺힌다.”
이 마지막 문장은 시의 요약이자 인류의 선언이다.
감사는 종교적 덕목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나무는 태양에 감사하고, 흙은 비에 감사하며, 인간은 서로의 땀과 눈물에 감사한다.
이 시에서 한가위는 단지 ‘명절’이 아니라, 감사의 철학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이 감사는 수직적 신앙이 아니라, 수평적 연대다.
감사는 인간과 인간, 세대와 세대, 생명과 생명 사이를 연결하는 ‘둥근 윤리’이다.
그리하여 이 시의 마지막 한 행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시 전체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의 마침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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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적
위상 민속에서 인문으로>
전홍구는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 든다.
그는 향토적 소재를 사용하지만, 낭만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송편은 단지 음식이 아니라 우주론의 상징이고, 그의 달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시간의 원이다.
이 작품은 한국 현대시가 지닌 가장 깊은 미덕이며 공동체적 서정을 완벽히 구현한다.
윤동주의 ‘별’이 개인의 내면을 비추었다면, 전홍구 시인의 ‘달’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다.
이 시는 단절의 시대에 ‘연결의 시학’을 회복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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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구조 황혼의 색과 둥근 리듬>
이 시의 언어는 리듬적으로 완결되어 있다.
각 연이 4행으로 구성되며, 한 행마다 여백이 넉넉하다.
그 여백은 마치 달의 고요처럼, 시각적 정적과 청각적 침묵을 담아낸다.
“가을 저녁-- 황금--둥금-- 감사”로 이어지는 어휘의 구조는
음운적으로도 부드러운 비음으로 연결된다.
이 리듬은 독자의 호흡을 안정시키며, 달빛의 둥근 파동을 닮는다.
그리하여 이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는 시’로 기능한다.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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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시간 속의 인간학
전홍구 시인의 〈가을의 저녁, 한가위〉는 한국적 존재론의 정수다.
그의 시에는 농경의 신성, 조상의 기억, 인간의 윤리, 자연의 미학이 하나의 원 안에서 호흡한다.
그 둥근 세계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달빛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조상이며 서로의 후손이다.
그것이 바로 이 시가 전하는 감사의 형이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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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둥근 달빛 아래의 시학 선언>
> 달은 나누어질수록 둥글고,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며,
삶은 감사할수록 완전해진다.
전홍구 시인의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조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물음 속에서 한가위는 단지 명절이 아니라 삶의 윤회이자 감사의 철학이 된다.
그의 시는 이렇게 말한다.
> 가을 저녁,
달빛은 우리를 비추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비추게 한다.
그리하여 한가위의 달은 결국,
모든 생이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떠올리는
기억의 달이며 감사의 시로
"가을의 저녁 한가위 시"가 감성의 서정시로 둥글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