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
《러시아 파병과 수조 원의 그림자》
■
박성진 문화평론
■
<서문> 총알받이의 슬픈 경제학
전쟁의 역사는 언제나 돈과 피로 기록된다.
총성이 울리는 곳마다, 인간의 목숨은 숫자로 환산된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터에서도 같은 공식이 작동하고 있다.
총알받이의 자리에 인간이 서고, 그 대가로 수조 원대의 외화가 흘러간다는 소식은 현대문명의 냉혹한 초상이다.
북한 병력이 러시아 전선으로 파병되고, 그 대가로 거액의 외화가 북한 정권에 들어간다는 보도는 사실 여부를 떠나 인류 양심의 경고음이다.
이것은 한 나라의 내부문제나 단순한 외교 협력의 차원을 넘어선다.
한 국가가 자국민의 생명을 외화로 교환하는 구조가 탄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냉혹한 교환의 실체를 문명비평의 시선으로 읽어내려 한다.
경제, 정치, 윤리, 그리고 인간의 가치에 이르기까지
‘피의 경제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
<수조 원의 대가 피로 환산된 외화>
러시아가 북한에 제공한다는 외화는 단순한 거래비용이 아니다.
그것은 한 체제의 생명 유지비이자, 전쟁의 윤리적 붕괴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북한은 전쟁을 ‘혁명적 의무’라 부르지만, 그 의무가 외화의 단위로 계산될 때 혁명은 장례를 맞는다.
병사 한 명의 목숨이 ‘보상금’으로 환산되는 순간,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숫자가 된다.
죽음은 통계로 변하고, 슬픔은 외화로 대체된다.
수조 원대의 돈이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 현실은, 결국 이념의 파산선을 드러낸다.
혁명의 기치는 남았으나, 그 기치 아래 흘러내리는 것은 피가 아니라 화폐다.
■
<수익의 흐름 인민 없는 자본주의>
북한의 경제 구조는 철저히 ‘권력 중심 외화 경제’다.
해외노동자, 무기 수출, 마약 밀매, 그리고 이번 파병까지, 모든 외화 루트는 중앙 권력의 금고로 흘러간다.
일반 주민에게 돌아가는 몫은 거의 없다.
이번 파병도 다르지 않다.
병사 개인이나 유족에게 돌아갈 돈은 극히 제한적이다.
수조 원의 대가 중 대부분은 중앙집권 구조 속에서 지도부와 군 수뇌부, 보위기관의 운영비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피의 돈’은 체제의 산소로 바뀌고, 인민은 숨 막히는 침묵 속에 방치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보다 더 잔혹한 형태이다.
인민 없는 자본주의, 즉 권력만 남은 경제의 망령이다.
■
<러시아의 계산법, 피보다 값싼 인력>
푸틴의 계산은 단순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인력이 필요하다.
자국 병사의 사망은 정치적 부담이 되지만, 외국 병사의 죽음은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북한 병력은 러시아에게 정치적으로 무(無)한 인력자원이다.
값싸고, 통제 가능하며, 실패해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제국의 냉정한 계산이다.
러시아는 인도적 명분을 내세우겠지만, 실상은 경제적 계약이다.
그 대가로 수조 원을 지불한다면, 그것은 군사비가 아니라 윤리의 파산비용이다.
피보다 값싼 인력을 사들이는 시대, 그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소모품이다.
■
<윤리의 붕괴 인간을 수출하는 국가>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존재다.
그러나 북한은 이제 국민을 전쟁 시장의 자원으로 내보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행위가 아니다.
국가의 윤리적 근간이 무너지는 행위이며, 국민주권의 자살이다.
사람이 수출품이 되고, 피가 수입품이 되는 이 구조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모욕이다.
한 명의 병사가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할 때, 남겨진 자식의 눈물은 외화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체제는 그 눈물을 ‘체제 유지비’로 계산한다.
윤리가 붕괴된 자리에 남는 것은, 돈으로 윤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반(反) 문명의 형태다.
■
<국제법의 사각지대, 합법의 이름으로 불법을 감춘다>
북한과 러시아는 이번 협력을 ‘국가 간 군사협력’이라 포장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용병 파견과 다르지 않다.
국제법적으로 외국 용병의 사용은 명백히 제재 대상이다.
하지만 국가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행위는 ‘합법’이라는 외피를 입는다.
그 외피 안에서는 어떤 비윤리적 행위도 정당화된다.
이것이 국제법의 구조적 맹점이다.
국가 주권이 인간의 생명권보다 우선하는 순간, 법은 윤리를 잃는다.
결국 전쟁터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피는 법의 잉크가 아니라 침묵의 서명으로 남는다.
■
<인권의 장례식 침묵하는 세계>
국제사회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정기보고서에서 이 사안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러시아와 북한을 동시에 자극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 침묵은 공모의 침묵이다.
경제 제재와 안보 이해관계가 우선되면서, 인간의 생명은 부차적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전쟁 피로감’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그러나 그 피로의 본질은 무감각의 타락이다.
한때 인류는 ‘인권’을 문명의 척도로 삼았다.
이제 인권은 뉴스의 하단, 광고 배너 밑으로 내려갔다.
피가 마르기 전에 무감각이 먼저 마른다.
■
<체제의 숨통 수조 원의 정치학>
수조 원의 외화는 북한에게 단기적 활력을 준다.
식량난을 잠시 완화하고, 군수품을 보충하며, 내부 불만을 달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민의 피로 만든 연료다.
체제가 외화로 연명하는 순간, 그 체제는 이미 죽은 것이다.
외화는 피의 응급처방일 뿐, 병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그 돈은 새로운 탄압과 군비 경쟁, 그리고 핵개발로 이어질 것이다.
돈이 들어올수록, 자유는 멀어진다.
체제가 호흡할수록, 인민은 숨을 잃는다.
그것이 이 거래의 잔혹한 역설이다.
■
<러시아, 북한 동맹의 심리전 이용과 공포의 교환>
푸틴과 김정은의 관계는 동맹이 아니다.
그것은 공포의 거래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푸틴에게 북한은 제재의 틈새를 메워주는 ‘저가형 병참선’이다.
김정은에게 러시아는 생존의 우산이다.
그러나 이 ‘우산’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러시아의 전황이 불리해지면, 북한 병력은 더 깊은 전선으로 내몰릴 것이며, 전쟁의 희생양이 된다.
이 심리전의 이면에는 서로를 인질로 삼은 냉정한 계산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를 ‘동지’라 부르지만, 실상은 서로의 ‘인질’이다.
■
<한국의 시선 분단의 그림자>
남한은 이 사안을 단순히 ‘북한의 외교행위’로 볼 수 없다.
그것은 한반도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피가 다른 나라의 전쟁터에서 흘러가고, 그 대가가 외화로 환산되는 이 현실은
분단의 비극이 경제의 언어로 재현된 장면이다.
통일의 꿈은 멀어지고, 남북의 거리에는 피의 강이 더 깊어진다.
북한 병사가 타국의 전선에서 쓰러질 때, 남쪽의 시민은 뉴스에서 그 소식을 접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남북 모두의 슬픔이자, 한민족의 윤리적 손실이다.
■
<언론과 진실 보도의 한계와 윤리>
언론은 ‘수조 원’이라는 자극적 숫자에 집중한다.
그러나 정작 그 안의 인간 이야기는 없다.
전쟁 보도는 클릭 수의 경쟁으로 전락했고, 진실은 흥행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팩트체크의 어려움이 언론의 침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언론의 사명은 정확성만이 아니라 진실의 온도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읽는 뉴스가 냉정한 숫자뿐이라면, 그 사회는 이미 감정을 잃은 것이다.
■
<문명의 반성 피로 쓰인 계약서>
이 사건은 단지 북한과 러시아의 정치적 거래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문명이 인간을 숫자로 전락시킨 구조적 증거다.
우리는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감각은 퇴화했다.
문명은 더 정교해졌지만, 더 냉혹해졌다.
화폐는 윤리를 대체했고, 계산은 양심을 밀어냈다.
그리하여 피로 쓰인 계약서가 문명의 자화상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문명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문명을 위해 존재하는가?”
■
<결론>
■
인간의 가치는 얼마인가
수조 원의 돈이 오간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돈이 인간의 생명을 사고판다는 현실이다.
한 명의 병사가 전선에 서는 순간, 그 뒤엔 가족의 기도가 있고, 그 기도는 한 푼의 환전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계는 묻지 않는다.
“그의 생명은 얼마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북한과 러시아는 세계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만행을 언제까지
할 것이며 인간의 최소한의 양심 없는 공산사회의 구조를 어디까지 이해하라는 것인지
세계가 직시하고 있다.
<문화평론가 박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