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모상철 시인-성하의 계절》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성하의 계절〉


竹泉 모상철


하루를 깨우는 햇살이

연둣빛 내음을 삼키고

화사하게 창을 두드린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흥겨운

단풍잎이 청량한 바람결에

멋들어진 춤사위를 펼쳐 보인다


길가의 이팝나무

송글이는 진액을 짜내고

손가락 사이에 갇힌 태양은

오열을 토해 놓는다


육신은 발자국 소리 따라나서지만

멀어져 가는 님 그림자

세풍에 뒹굴고 능선에 걸친

노을빛은 손짓을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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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윤회와 존재의 감각 — 여름의 철학을 노래한 자유시조의 미학》


박성진 문화평론




<여름의 빛 속에 깃든 영혼의 사유>


〈성하의 계절〉은 자연을 노래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시다.

표면적으로는 계절의 풍경시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생의 유한성에 대한 철학이 짙게 배어 있다.

‘성하’는 한자로 盛夏, 즉 가장 무르익은 계절을 뜻하지만, 그 무르익음의 끝에는 반드시 쇠락이 있음을

함축하였다.

이 시조는 그 미묘한 경계, 곧 풍요 속의 허무, 찬란함 속의 슬픔, 생명 속의 죽음을 포착한다.

자연의 변화를 통해 인간 존재의 순환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자유시조’라는 형식 안에서 전통의 절제와 현대의 해방을 결합한 아름다운 실험이다.




<빛의 탄생, 존재의 각성>


“하루를 깨우는 햇살이 / 연둣빛 내음을 삼키고 / 화사하게 창을 두드린다.”

이 구절은 시의 서두이자, 세계의 개벽 장면이다.

‘하루를 깨우는 햇살’은 단순한 아침의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무(無)에서 유(有)가 열리는 창조의 행위이다.

시인의 의식이 ‘잠’에서 ‘깨어남’으로 이동하는 영적 사건이다.

햇살이 ‘연둣빛 내음’을 삼킨다는 표현에는

자연의 감각적 조화와 생명의 호흡이 녹아 있다.

‘삼킨다’는 동사는 생명의 흡입이자 시간의 흘러감이며,

그 위로 ‘창을 두드린다’는 청각적 동작은

인간 내면의 각성, 존재의 초대, 생명의 첫 울림을 의미한다.

즉, 이 시조의 첫 장은 단순한 계절의 묘사가 아니다. 존재의 서문이다.



<감각의 화음, 자연과 인간의 공명>


시인은 빛과 냄새와 촉감을 엮어 감각의 교향곡작시한다.

‘햇살–내음–창’이라는 세 개의 이미지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청각, 후각, 시각을 한데 묶는다.

이처럼 감각의 타성적 결합은 자유시조의 중요한 특징이다.

시조의 리듬을 지키되, 언어의 감각적 질서를 자유롭게 확장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시적 공명을 완성한다.

햇살이 인간의 창을 두드린다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자,

인간이 자연의 소리를 듣는 첫 번째 ‘청취의 시학’이다.

모상철 시인의 언어는 화려하지 않지만, 그 절제 속에 깊은 삶의 울림이 있다.




<단풍의 역설, 시간의 전복>


“지저귀는 새소리가 흥겨운 단풍잎이 청량한 바람결에 멋들어진 춤사위를 펼쳐 보인다.”

여름에 단풍잎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독자를 멈칫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적 오류가 아니라 의도된 시간의 전복이다.

단풍은 가을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여름의 풍경 속에 등장함으로써

‘절정 속의 쇠락’ 임을 암시하였다.

시인은 시간의 직선을 구부려, 생의 끝과 시작이 맞닿은 원형의 시간을 제시하였다.

‘춤사위’는 생명의 몸짓이자 죽음의 연무(演舞)다.

그 춤은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시인은 춤추는 단풍잎을 통해

“죽음도 결국 생의 일부이며, 소멸은 또 다른 탄생이다”라는 자연의 진리를 노래한다.




<리듬의 해방, 시조의 현대적 변용>


모상철 시인의 시조는 전통의 틀을 해체하지만, 그 안의 호흡을 잃지 않는다.

전통 시조의 초·중·종장 구조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각 행은 3·4·4의 리듬을 기반으로 흘러간다.

이 리듬은 정형시의 기율과 자유시의 해방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시인의 문장은 길지 않지만, 행간의 침묵이 리듬을 대신한다.

즉, ‘언어의 침묵’을 통해 운율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자유시조의 본질이다. 자유로움 속의 질서, 해방 속의 긴장.

시조의 숨결을 현대의 공기로 다시 빚어내는 과정이다.




<이팝나무의 눈물, 여름의 고통>


“길가의 이팝나무 송글이는 진액을 짜내고 손가락 사이에 갇힌 태양은 오열을 토해 놓는다.”

이 연은 시의 심장부다.

이팝나무는 생명의 상징이지만, 이 시조에서는 소모의 상징으로 변한다.

‘진액을 짜내는’ 행위는 생명의 에너지가 고통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모상철 시인은 자연의 ‘빛’뿐 아니라

‘피로’를 본다.

그는 자연을 소비하는 인간 문명에 대한 묵시록적 시선을 드러내었다.

‘손가락 사이에 갇힌 태양’은 인간이 시간과 자연을 소유하려는 욕망의 표상이다.

그 태양이 결국 ‘오열’을 터뜨리는 장면은

자연의 보복이자 슬픔의 절규이다.

즉, 이 시조의 여름은 찬란함과 함께 울고 있다.




< 자연의 윤리, 인간의 반성 >


모상철 시인의 시학은 생태적 윤리에 근거한다.

그의 자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도덕적 존재’다.

햇살은 깨우고, 단풍은 춤추고, 이팝나무는 고통받으며, 태양은 눈물을 흘린다.

이들은 모두 말 없는 생명체이지만,

시인의 눈에선 그들이 모두 윤리적 행위자로 보인다.

시인의 시는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역전된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이 우리를 본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가”라는 질문까지 숨어 있다.

자유시조의 자유란 형식의 자유뿐 아니라,

윤리적 자각의 자유이기도 하다.




<육신의 길, 영혼의 그늘>


“육신은 발자국 소리 따라나서지만 멀어져 가는 님 그림자.”

이 문장은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를 보여준다.

육신은 땅 위를 걸으나, 영혼은 이미 다른 세계로 향하고 있다.

‘님’은 구체적인 인물일 수도, 이상일 수도, 신일 수도 있다.

그림자를 잃은 육신은 존재의 공허 속에 서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그 허무를 절망이 아닌 순명의 상태로 표현한다.

인간은 그리움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또힌 그 그리움이 존재를 완성시켜 나간다.




< 노을빛의 손짓, 순명의 미학 >


“세풍에 뒹굴고 능선에 걸친 노을빛은 손짓을 해댄다.”

세상의 바람에 휘말린 인간이 끝내 도달하는 곳은 노을빛이다.

노을은 하루의 끝이지만, 동시에 다음 날의 예고편이다.

그 빛은 사라짐이 아니라 순환의 문이다.

노을의 손짓은 죽음의 부름이 아니다. 귀환의 초대다.

시인은 그 손짓을 통해 인간 존재의 궁극을 노래한다.

삶이란 떠남과 돌아옴의 반복이며,

그 끝에서 인간은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 자유시조의 완성, 전통의 숨결 >


〈성하의 계절〉은 자유시조가 단순히 ‘형식의 파괴’가 아니라,

‘정신의 계승’ 임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시조의 긴장감, 정제된 언어, 여백의 미를 유지하면서도

구조적으로는 완전히 열린 시이다.

모상철 시인은 정형의 껍질을 벗고 본질의 리듬만을 남긴다.

시인의 언어는 마치 송나라 도공의 백자처럼 단순하고 맑다.

그 단순함 속에서 울림은 매우 깊다. 그가 도달한 자유는 질서의 자유이다.




<시간의 사유, 존재의 윤회>


햇살에서 시작해 단풍과 이팝나무를 지나 노을로 끝나는 구조는

시간의 직선이 아니라 원을 이루고 있다.

그 원은 하루이자 인생이고, 계절이자 윤회이다.

모상철 시인은 ‘성하’를 통해 시간의 불멸성을 말한다.

사라지는 것들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빛은 꺼져도 여운은 남고, 여름이 끝나도 생명은 순환한다.

이 시는 그 불멸의 원리를 시조적 호흡으로 정련한

한 편의 철학을 담아낸 자연시이며 명상 시이다.




<여름의 찬가, 존재의 평화>


〈성하의 계절〉은 단순한 계절의 노래가 아니다. 존재의 진혼가이자 찬가이다.

여름의 화려함 속에서 시인은 이미 이별을 본다.

그러나 그 이별은 두려움이 아닌 평화다.

모상철 시인의 시조는 “삶은 뜨겁고, 죽음은 고요하다.

둘은 결국 하나다”라는 자연의 법칙을 읊고 있다.

그의 자유시조는 시적 형식의 해방이 아니다. 존재의 해탈이다.

이 시를 읽는 우리는, 한낮의 태양이 오열하는 순간조차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깨달음이야말로 현대문학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위로이다.




<총평>

〈성하의 계절〉은 현대 자유시조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연의 언어로 인간을 말하고, 시간의 언어로 철학을 노래한다.

그 언어는 조용하지만 깊고, 고요하지만 뜨겁다.

모상철 시인은 여름을 통해 성하의 계절의

전 과정을 함축하여 현대시조를 자유롭게 유영시키는 자유로움을 현대시조사에 던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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