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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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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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강남역
설치미술전 그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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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시인
〈백골의 노래 기형도의 그림 앞에서〉
철모가 녹은 자리,
빛은 뼈를 비추며 흐른다.
누구의 이름이었을까,
총 대신 시를 품고 쓰러진 이여.
그대의 눈동자에는 아직
고향의 푸른 언덕이 남았는가.
어머니 젖냄새 같은
바람이 들판을 스치던 그날의 향기가 남았는가.
피로 그린 강줄기 위로
새들은 검은 날개를 접고,
기형도의 그림 속에서는
하늘조차 울고 있었다.
나는 그대의 유해 앞에 서서
국경 없는 눈물을 꿇어앉는다.
그대가 버린 총구 끝에서
백합 한 송이가 피어나기를
《기형도의 그림 속, 죽음의 미학과 인간의 구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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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초상과 인간의 불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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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단순한 전쟁화가 아니다.
기형도의 시 세계처럼, 죽음의 형태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잔광(殘光)을 그린 초상이다.
박성진 시인은 이 회화 앞에서 시를 봉헌하듯 묵상한다.
“빛은 뼈를 비추며 흐른다.”
이 한 줄은 기형도의 회화가 지닌 철학을 압축한다.
피와 뼈가 해체된 육체는 잔혹하되,
그 위로 스며드는 빛은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윤리의 빛이다.
박성진 화가의 시는 그 빛을 언어로 옮긴 ‘진혼시’이며,
그림은 시인의 내면에서 울리는 시각적 기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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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적 왜상(歪像) 절망 속의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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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그림에서 인체는 온전하지 않다.
팔은 잘려 있고, 머리는 비틀렸으며,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 멈춰 있다.
그 ‘기형’은 현실의 참혹함이 아니라 인간의 절규를 형상화한 언어적 신음이다.
박성진 시인은 이러한 형상을 “총 대신 시를 품고 쓰러진 이여”로 치환한다.
즉, 시인은 ‘총을 든 인간’이 아니라 ‘언어로 싸운 인간’을 그린다.
기형도의 붓끝에서 터져 나온 기형적 인체는,
박성진 화가의 시 속에서는 윤동주의 후예로서, 도덕적 인간의 초상으로 거듭난다.
그는 ‘전쟁의 기형’을 ‘인간의 초상’으로 승화시키며,
“왜곡된 신체 속에서도 존엄은 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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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뼈, 윤리의 미학으로의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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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하얀 뼈 위를 스치는 희미한 빛이다.
그 빛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도덕적 각성을 요구한다.
박성진 시인의 “빛은 뼈를 비추며 흐른다”는 구절은 바로 이 빛을 언어로 옮긴 순간이다.
그는 고통의 현장을 회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상처 속으로 들어가 빛의 신학(神學)을 건져 올린다.
기형도의 회화가 죽음의 순간을 ‘정지된 시간’으로 만든다면,
시인의 시는 그 정지된 순간에 기도와 윤리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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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언어 두 예술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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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그림에서 피는 색채다.
그 붉은 흔적은 언어보다 먼저 울부짖는 ‘비명’이다.
박성진은 그 피를 다시 언어로 옮겨 ‘기도의 언어’로 바꾼다.
그의 시는 피의 색이 아니다. 피의 향기를 노래한다.
6,25 전쟁의 참혹함은 미학적 죄책으로 변환되고,
그림은 시와 함께 ‘눈물의 기도문’이 된다.
여기서 예술가는 침묵 속에서 대화한다.
기형도는 붓으로 죽음을 기록하고,
박성진 시인은 시로 그 죽음을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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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에서 윤동주로, 예술적 계보의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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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은 기형도의 회화에서 윤동주의 영혼을 본다.
둘 다 죽음과 생의 경계에서 시를 선택한 인간들이다.
기형도가 도시의 폐허 속에서 ‘죽음의 현대’를 그렸다면,
박성진 시인은 민족의 상처 속에서 ‘구원의 시학’을 세운다.
“국경 없는 눈물을 꿇어앉는다”는 구절은
윤동주 시인의 ‘인간의 죄의식’과 기형도의 ‘절망의 시학’을
하나의 기도로 통합하는 순간이다.
이 시는 한국 시단이 품어온 죽음의 미학과 생명의 윤리의 계보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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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의 구도와 기형의 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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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속 중앙에는 뭉크의 백골 해골이 중앙에 포착된다. 무수한 기형도는 병사들의 슬픈 스토리가 무수히 각각의 기형에 질서 정연하게 펼 펴진다.
그 옆에는 뼈로 보이는 흰 선이 이어지고,
하늘과 지면의 경계는 무너져 있다.
이 구도는 하늘이 무너진 인간의 시간,
즉, 신의 부재 속에서 인간이 신이 되어야 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기형도는 그 구도를 통해
‘죽음의 절벽 위에 서 있는 인간의 실존’을 시각화했다.
박성진 시인은 그 회화의 긴장을 언어로 재현하여,
“총구 끝의 백합”이라는 역설적 상징으로 완성시킨다.
백합은 순결의 표상이자, 희생의 재림이다.
그림 속 흰빛과 시 속 백합은 서로를 비춘다.
그 만남은 곧 예술이 종교가 되는 순간,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미학적 성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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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맥락 6·25의 기억과 예술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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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특정 전투나 개인을 그린 것이 아니다.
무명 병사들의 무수한 죽음을 한 인체로 응축한 상징화된 초상이다.
그림은 역사적 사실보다 정신적 진실을 말하고,
박성진 시인의 시는 그 정신을 문학으로 계승한다.
6·25의 상처는 이제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
‘기억의 전쟁’으로 남아 있다.
박성진 화가의 그림과 시는 그 기억의 불씨를 지켜내는 예술의 사제들이다.
그들의 사명은 단순히 추모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남겨야 할 마지막 아름다움의 용서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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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부활, 인간의 초상
기형도의 그림이 보여주는 기형은
인간이 감당해야 할 운명의 일그러짐이다.
그러나 박성진 미술의 시는 그 기형 속에서
‘백합 한 송이의 부활’을 피워낸다.
화가의 시는 전쟁의 잔해 위에 놓인 인간의 불멸을 선언하는 언어의 조형물이며,
기형도의 그림은 그 시의 전조(前兆)로서
죽음이 결코 침묵으로 끝나지 않음을 증언한다.
예술가의 만남은 곧 죽음을 넘어선 인간의 예술사적 부활이다.
그림이 죽음을 그렸다면,
시는 그 죽음을 다시 살아내는 길을 열었다.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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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와 시의 윤리적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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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병사들의 희생을 기형도로 그린 그림〉은
기형도의 회화가 지닌 절망의 미학 위에
박성진 시인의 구원 시학이 교차하는 자리다.
그곳에서 예술은 다시 종교가 되고,
전쟁은 다시 인간의 기도로 환원된다.
“총구 끝의 백합”
그것이 바로 박성진 설치미술가 시인이 남긴
인간의 희생과 예술의 윤리적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