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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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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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일 시인
억새풀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쓰러져 무더기로 엉켜있는 들판을, 나 혼자 걷는다.
서녘하늘 저 멀리 이름 모를 들새 한 마리, 누군가를 찾아가는 모양이다.
죄 없이 자유를 뺏기고 죽어 밤하늘의 별이 된 사람을.
바람 한 점 없는지, 억새풀들은 엉긴 채로 쓰러진 채로 꼼짝도 못 하는데,
나의 두 눈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느닷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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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와 눈물의 윤회 — 주광일 〈가을 들판에서〉 평론》
박성진 문화평론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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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적막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눈물
이 시는 단순한 가을의 정경을 노래하는 자연시가 아니다. 주광일 시인은 ‘억새풀’이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의 생애, 역사, 그리고 기억된 슬픔을 상징화한다. 들판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억압과 상처, 그리고 자유를 빼앗긴 존재들이 잠든 ‘기억의 장소’다. 시적 화자는 그 공간을 걷는 ‘증언자’의 시선으로 등장하며, 억새의 침묵 속에서 세월이 묻어둔 눈물을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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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의 이미지 — 쓰러짐 속의 연대와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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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첫 문장은 시각적이면서도 강렬하다. “억새풀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쓰러져 무더기로 엉켜있는 들판.”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다. ‘부둥켜안고 쓰러져 있다’는 표현은 연대의 몸짓이다. 억새는 서로를 지탱하며, 쓰러짐조차 함께 감당한다.
이는 억압된 민중의 역사적 집단기억이자, 고난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던 인간들의 초상이다.
주광일 시인은 억새의 쓰러짐을 ‘패배’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함께 견딘 존재들의 품격 있는 굴복’이며, 상처 속에서 피어난 연민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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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녘하늘과 이름 모를 들새 — 자유의 영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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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녘하늘 저 멀리 이름 모를 들새 한 마리, 누군가를 찾아가는 모양이다.” 이 구절은 시의 중심축을 이동시킨다. 억새풀의 땅에서, 새의 하늘로 시선이 옮겨간다. ‘서녘’은 죽음과 해방의 상징이자, 영혼의 귀향을 암시한다. ‘이름 모를 들새’는 억눌린 인간의 자유혼, 혹은 희생자의 영혼으로 읽힌다. 그가 찾아가는 이는 “죄 없이 자유를 빼앗기고 죽어 밤하늘의 별이 된 사람” — 바로 우리 시대의 순교자들이며, 잊힌 역사 속의 이름 없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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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빼앗긴 이의 상징 — 별이 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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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속의 ‘별’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다. 그것은 지상에서 부당하게 꺾인 생명들이 하늘에서 다시 빛으로 환생한 존재다.
이 한 문장은 역사적 슬픔의 압축이자 윤리적 상징이다. 주광일 시인은 이 대목에서 민족적 비극이나 개인의 상처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 없이 죽어 별이 된 사람’이라는 표현만으로, 독자는 시대의 수많은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시적 절제와 윤리적 울림이 만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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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없는 들판 — 정지된 시간의 메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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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점 없는지, 억새풀들은 엉긴 채로 쓰러진 채로 꼼짝도 못 하는데.”
이 정지된 시간의 이미지는 죽음 이후의 세계, 혹은 망각의 세계를 상징한다. 억새풀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단순한 자연의 고요가 아니라, 역사의 침묵이다.
바람이 없다는 것은 곧 ‘진실을 움직이는 힘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화자의 눈물’이 흐르며, 정지된 세계에 생명과 감정이 되돌아온다. 눈물은 다시 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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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의미, 인간성의 최후의 증언을 마지막 문장에서 시인은 묻는다. “나의 두 눈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느닷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이 질문은 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론적 자각의 탄식이다. 눈물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됨의 증거’로 기능한다.
억새가 쓰러진 세상에서, 바람이 멈춘 세상에서, 여전히 눈물이 흐른다는 사실은 인간이 아직 ‘살아있음’을 증언한다.
이 눈물은 시대의 윤리적 저항이며, 동시에 망각에 대한 예술적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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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행위와 기억을 되살리는 순례의 길에
시적 화자는 ‘나 혼자 걷는다’고 말한다.
이 걷기는 단순한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복원하는 ‘기억의 순례’이며, 억새로 덮인 무덤들을 향한 ‘비탄의 행진’이다. 고요한 들판을 걷는 한 사람의 발걸음은, 역사의 수많은 침묵 위를 지나간다. 걷는다는 것은 곧 ‘생존의 책임’을 짊어지는 행위이다.
시인은 그 걷기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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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의 침묵에서 들리는 인간의 목소리
〈가을 들판에서〉는 자연의 풍경시를 넘어선 ‘기억의 윤리시’이다. 억새는 쓰러졌으나, 시는 서 있다. 바람은 멈췄으나, 눈물은 흐른다. 이 모순 속에서 시인은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주광일 시인의 언어는 단아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다. 그가 그려낸 가을 들판은 한 시대의 무덤이다.
동시에 인간의 연민이 다시 피어나는 공간이다. 법조인의 삶에서 꽃을 피우는
문학인의 길 위에서 아직 못다 한 꿈의 여정을
향하여 시는 가을의 끝에서 묻는다.
“당신의 마음속에도 아직 바람이 부는가?”
그 질문이 바로, 시인의 시가 살아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