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문학박사 정근옥-석별, 그날의 저녁별》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석별, 그날의 저녁별〉


정근옥 시인


철새들이 떠나간 하늘은

연묵빛 짙게 깔려 가슴이 저리다


파도가 쓸고 간 겨울 바다 위에

한없이 깜박이는 별빛


어머니가 심어놓고 떠난 도라지꽃

그 보랏빛 그리움 한 잎


얼음장보다 차갑게

철썩이는 물결 위에 어른거린다


푸른 천에 수놓아진 낯익은 고향

산빛,

새벽마다 하얀 눈물로 적셔진다




정근옥 시인 〈석별, 그날의 저녁별〉




석별의 시간, 별빛의 기억


정근옥 시인의 〈석별, 그날의 저녁별〉은 ‘이별’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보다 더 깊고 조용한 떠남의 슬픔을 별빛으로 직조한 작품이다.

제목 속의 “석별(惜別)”과 “저녁별”이라는 병치는 감정의 수위를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시킨다. 저녁별은 ‘이별의 시간’을 상징하는 동시에, 남겨진 자의 눈빛처럼 꺼지지 않는 그리움의 등불이다.

이 시는 단순한 정조의 표현을 넘어, 부재(不在)의 미학, 즉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에 피어나는 ‘그리움의 형상’을 절묘하게 형상화한다.



<하늘의 연묵빛 떠남의 잔상>


“철새들이 떠나간 하늘은 / 연묵빛 짙게 깔려 가슴이 저리다.”

이 첫 구절에서 정근옥 시인은 풍경을 감정의 매개체로 사용한다. ‘철새’는 떠나는 존재, ‘하늘’은 그것을 지켜보는 무한한 공간, 그리고 ‘연묵빛’은 시간의 퇴적층을 상징한다.

이 구절의 핵심은 ‘가슴이 저리다’는 감각적 표현에 있다. 떠남의 아픔을 언어로 직접 명명하지 않고, 빛의 농도로 표현한 시인의 절제된 언어 감각은 전통적 서정시의 품격을 보여준다. 연묵빛은 마치 먹을 번지듯 번져, 남겨진 이의 심연을 물들인다.



<별빛과 바다 영원의 경계에서>


“파도가 쓸고 간 겨울 바다 위에 / 한없이 깜박이는 별빛.”

겨울 바다는 생명과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그 위에 반짝이는 별빛은 죽음 이후의 기억의 잔광을 암시한다. 별은 우주의 심장이자, 인간의 눈물이다.

파도와 별, 차가움과 빛이 교차하는 이 장면은 이 시의 정서적 정점이다. 정근옥 시인은 이 한 연으로, 시간의 수직성을 시각화한다.

즉, 수평으로 펼쳐진 바다 위에 수직으로 내려오는 별빛을 통해,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의 간극을 메우는 시적 가교를 세우고 있다.



■<도라지꽃 어머니의 영혼과 향기>


“어머니가 심어놓고 떠난 도라지꽃 / 그 보랏빛 그리움 한 잎.”

이 대목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적 핵심이다. 도라지꽃은 한국적 정서에서 ‘그리움의 표징’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모성의 기억, 혈연의 근원, 존재의 뿌리를 상징한다.

시인은 ‘도라지꽃’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떠난 어머니의 숨결과 남은 자의 그리움을 하나로 묶는다. ‘보랏빛’은 사랑의 농도를, ‘한 잎’은 덧없음을 의미한다.

그 한 잎의 흔들림 속에는 수십 년의 회한이 담겨 있다.



<차가운 물결과 따뜻한 기억>


“얼음장보다 차갑게 / 철썩이는 물결 위에 어른거린다.”

이 연은 감정의 극점과 절제의 미학을 동시에 구현한다. 차가운 바다 위에 어른거리는 것은, 단순한 물결이 아니라 기억의 환영이다. ‘얼음장’과 ‘철썩임’이라는 감각적 대비는 냉정한 현실과 흔들리는 내면을 병치시킨다. 시인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그 대신 냉정한 묘사로 애도를 수행한다. 여기서 시의 언어는 애도의 장송곡이 아니라, 무표정한 슬픔의 초상화가 되었다.



<푸른 천과 고향의 산빛>


“푸른 천에 수놓아진 낯익은 고향 / 산빛.”

이 연은 기억의 풍경으로서의 ‘고향’을 소환한다. ‘푸른 천’은 하늘이자 인생의 도화지다. 그 위에 수놓은 ‘산빛’은 잃어버린 정서의 흔적이다.

이 이미지는 마치 자수를 놓는 손길처럼 섬세하다.

고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회귀와 내면의 귀의(歸依)를 의미하였다.



<새벽과 눈물 순환의 시간>


“새벽마다 하얀 눈물로 적셔진다.”

이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모든 슬픔을 눈물의 의례로 수렴한다.

새벽은 새로운 시작이지만, 동시에 끝나지 않은 그리움의 반복이다.

‘하얀 눈물’은 정화와 기억, 재생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즉, 시인은 이별의 비극을 단순한 상실로 마감하지 않고, 눈물을 통해 정화된 생명력으로 전환하였다.



<시간과 기억의 병치 구조>


〈석별, 그날의 저녁별〉은 수직적 구조를 지닌 시다. 하늘은 철새, 바다는 파도, 땅은 도라지꽃, 눈물은 내면의 세계로 이어지며 공간적 이동은 곧 삶과 죽음, 떠남과 남음의 층위를 은유한다. 각 장면은 정지된 순간이 아니다. 서서히 스러져가는 기억의 파편이다. 정근옥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한 폭의 풍경화로 고정시켰다.



<언어의 절제와 회화적 감각>


정근옥 시인의 언어는 불필요한 수식이 없다. 시적 이미지가 마치 수묵화처럼 흑백의 명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묵빛, 보랏빛, 푸른 천, 하얀 눈물, 등 색채 어는 모두 감정의 온도계로 작동한다.

그리고 시의 미감을 완성한다.

시인의 언어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의 응결이 되었다.




<모성과 귀향의 시학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개인의 슬픔이 아니다.

모성과 귀향의 보편적 정서를 담는다. 어머니와 고향, 별빛과 눈물은 한국적 서정시의 근원적 기호들이다. 정근옥 시인은 그 전통 위에 ‘이별 이후의 회귀’를 놓음으로써, 인간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과 화해의 가능성을 함께 노래한다.



< 저녁별 아래의 영혼 >


〈석별, 그날의 저녁별〉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선 시’다. 그러나 그 경계는 어둠이 아닌 빛으로 마감된다. 별빛은 어머니의 눈물이고, 새벽의 눈물은 곧 새로운 별이 된다. 정근옥 시인의 시는 이처럼 그리움이 곧 생명이고, 이별이 곧 시작인 역설의 미학을 구현한다.

결국 이 시는 한 편의 ‘조용한 기도’이다.

별빛 아래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에 간극을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시’라는 이름의 저녁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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