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이인애 시인-갈대와 신사》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갈대와 신사〉


다정 이인애


폭풍우에 넘어져 본 사람만이

실패와 좌절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안다


우수 띤 노래가 귀에 꽂히는

가을은 남자의 계절

살아야 한다

모진 세상 살아내야 함이다


풍파에 굽힐지언정

꺾이지 않으려

대공을 비운 채 서걱대는 갈대


가족의 부양을 위해

간·쓸개를 빼놓고

출근하는 우리 아버지

힘들어도 처자식 앞에서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신

아버지는 백발의 신사다


가을 갈대밭에 서면

바람이 지날 때마다

머리 푼 갈대와 흰머리 신사가

클로즈업된다

갈대의 울음에 섞인

남자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


《갈대와 신사 — 다정 이인애 시의 인간 존엄과 부성의 미학》


박성진 문화평론



<서문>

바람 속의 인간학


이인애 시인의 〈갈대와 신사〉는 인간의 존엄과 부성(父性)의 미학을 동시에 응축한 작품이다. 시인은 갈대의 형상 속에서 삶의 폭풍을 견디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며, 신사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의 품격과 윤리를 노래한다. 갈대는 흔들림의 상징이자 생존의 은유이고, 신사는 그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인간의 표상이다. 시의 중심에는 ‘살아야 한다’는 간절한 생존의 윤리가 놓여 있으며, 그것은 단지 남자의 계절인 ‘가을’의 감상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는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존엄과 존재의식의 선언이다.



<폭풍우의 철학, 쓰러짐을 견디는 자의 위엄>


“폭풍우에 넘어져 본 사람만이 / 실패와 좌절을 견디고 /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안다”는 시의 서두는 인생철학의 선언과 같다.

이 문장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인생의 근본 구조를 꿰뚫는 통찰이다.

인간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만 진정으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넘어짐은 패배가 아니라 성장의 조건이다. 이 대목은 니체의 “무너짐을 견딜 수 있는 자만이 더 높이 일어선다”는 사유를 연상시킨다. 시인은 갈대라는 자연물에 인간의 실존을 투사함으로써, 삶의 폭풍을 철학적 깊이로 승화시킨다.




<가을과 남성의 상징학, 우수와 존엄의 계절>


“우수 띤 노래가 귀에 꽂히는 /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구절은 가을이라는 시간의 질감 속에 남성의 생을 이식한다.

봄의 생동, 여름의 열정이 지나고, 가을은 성숙과 회한의 계절이다. 남성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가정과 사회, 의무와 책임의 굴레 속에서 성숙해 가는 인생의 중년기, 그것이 곧 ‘가을’이다. 시인은 그 시기를 “살아야 한다 / 모진 세상 살아내야 함이다”라는 구절로 함축한다. 이 짧은 명제에는 생존의 윤리와 인간의 의지, 그리고 절망을 견디는 자의 자존심이 응축되어 있다.



<갈대의 상징 흔들림 속의 강인함>


“풍파에 굽힐지언정 / 꺾이지 않으려 / 대공을 비운 채 서걱대는 갈대”에서 갈대는 인간의 영혼을 대변한다. 갈대는 바람 앞에서 유연하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그 허공은 비어 있으나, 비어 있기에 더 강하다. ‘대공(竹空)’이 상징하는 것은 비움의 철학이다. 즉, 자기중심을 비워내야 외풍을 견딜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인간이 세상의 풍파를 버티는 법은 완고함이 아니라 유연함에 있다. 갈대의 흔들림은 굴복이 아니라 생존의 지혜이며, 그것이 곧 신사의 덕목이다.



<‘신사’의 윤리 — 절제와 품격의 인간>


“가족의 부양을 위해 / 간·쓸개를 빼놓고 / 출근하는 우리 아버지”라는 대목은 시의 감정 중심이다.

여기서 ‘신사’는 단지 복장이나 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품격과 절제의 미학이다.

간과 쓸개를 빼놓았다는 표현은 희생의 극치를 드러낸다. 아버지는 생존의 전선에서 자신을 갈아 넣으며, 그러나 가족 앞에서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힘들어도 처자식 앞에서 /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신”이라는 구절은 묵묵함 속의 고결함을 보여준다. 이때의 신사는 ‘감정을 절제한 인간’, ‘고통을 품격으로 승화시킨 인간’이다.


<백발의 상징 세월의 품격>


“아버지는 백발의 신사다.” 이 한 문장은 시 전체의 미학적 정점을 이룬다. 백발은 세월의 흔적이자 고난의 증표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쇠락의 징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존엄의 상징으로 본다. 백발의 신사는 노쇠가 아니라 완성이다.

한 생애를 다해 책임을 지고 살아낸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품격의 높이, 그것이 백발의 신사다.

여기에는 노년을 향한 경의, 부성애에 대한 찬사, 그리고 인간의 내면적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담겨 있다.


<갈대와 신사의 미장센>


“가을 갈대밭에 서면 / 바람이 지날 때마다 / 머리 푼 갈대와 흰머리 신사가 / 클로즈업된다”는 대목은 영상미학적 장면이다.

시인은 ‘머리 푼 갈대’와 ‘흰머리 신사’를 병치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동일화를 시도한다.

이는 마치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정지된 장면 속에 시간의 흔적을 새긴다. ‘클로즈업된다’는 표현은 시적 영화기법으로, 관조의 시선을 카메라의 시선으로 바꾼다.

이 순간, 갈대의 흔들림은 신사의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습으로 중첩되며, 자연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인다.



<울음의 변주 남자의 눈물, 침묵의 윤리>


“갈대의 울음에 섞인 / 남자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이 결말은 시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이다.

남자의 울음은 외부로 터져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갈대의 바람소리로 환원된다.

이 울음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정제된 고통의 미학이다.

침묵 속의 울음,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품격이다. 이인애 시인은 ‘흐느낌’을 통해 남성적 감정의 이면, 즉 ‘참아낸 눈물’의 고결함을 그려낸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생의 아름다운 경건함을 느낀다.



<예술적 구조 현실과 시의 융합>


이 시의 구조는 명료하면서도 서정적 긴장을 잃지 않는다.

1연은 인생의 철학을 담았다.

2연은 현실의 직시이다.

3연은 상징적 이미지다.

4연은 부성의 서사이며

5연은 감정의 결미로 흐른다.

이 완성도 높은 구조는 시적 형식과 인간학적 내용이 완벽히 융합된 결과다.

또한 “폭풍우”에서 “갈대”, “신사”, “흰머리”, “흐느낌”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순환은 생의 궤적과 닮았다.

삶의 시작과 끝, 청춘과 노년, 고통과 품격이 하나의 순환고리로 연결되었다.



< 흔들림을 품은 품격의 찬가 >


〈갈대와 신사〉는 단순히 한 아버지의 이야기나 계절의 서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존엄을 향한 찬가이며, ‘흔들림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자’의 노래이다. 시인은 갈대의 유연함과 신사의 절제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폭풍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시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단어, “품격”과 “묵묵함”을 다시 소환한다.

말보다 행동이, 외침보다 침묵이, 감정보다 책임이 더 깊은 인간의 세계이다.


다정 이인애 시인의 이 시는 그 세계를 고요하게, 그러나 단단히 일깨운다.

결국 ‘신사’란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아니다.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을 정리할 줄 아는 인간이다.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갈대처럼, 그는 오늘도 가을의 바람 속에 조용히 서 있다.

그의 흰머리는 세월의 훈장이고, 그의 침묵은 인간 존엄의 마지막 삶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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