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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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코스 — 우주의 하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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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시인
나는 오늘도 집을 나서며 생각한다.
이 집의 주인은 나일까, 아니면 고양이일까?
그 녀석은 소파의 진짜 주인처럼 나를 내려다본다.
지구도 그렇다.
우리가 주인이라 우기지만
태양은 매일 월세를 받아가고,
달은 밤마다 찾아와 창문세를 받는다.
비가 오면 하늘의 수도관이 새는 것이고,
천둥은 은행에서 독촉전화가 오는 소리다.
별빛에 우주 전등이 깜박인다
그 아래서 우리는 집세 내는 세입자.
그래도 이 집은 참 넓다.
바다는 부엌,
숲은 거실,
하늘은 천장,
바람은 환기창이다.
어느 날은 나무가 나 대신 숨 쉬어주고,
어느 날은 구름이 내 빨래를 말려준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공동생활 아닌가.
우주는 거대한 오이코스,
지구는 그 속의 하숙집.
모두 조금씩 방세를 내며 산다.
빛으로, 숨으로, 사랑으로.
오늘 밤,
별 하나가 나에게 속삭인다.
“그대도 오이코스 이 집의 식구였음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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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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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코스, 우주적 집의 의미, 철학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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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코스, ‘집’에서 피어난 우주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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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오이코스(οἶκος)’는 단순히 거주 공간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 짧은 음절 속에는 문명, 신학, 철학, 그리고 생명의 질서가 숨어 있다.
‘경제(Economy)’와 ‘생태(Ecology)’가 모두 오이코스에서 유래했듯이
집은 인간의 존재가 시작되고, 사회와 세계가 확장되는 근원적 구조이다.
시인은 이 오랜 단어를 ‘우주의 하숙집’으로 새롭게 번역한다.
그의 시는 언어의 지붕을 들어 올려, 인간이 사는 집과
우주가 품은 ‘신의 집’ 사이의 연결고리를 시적으로 풀어낸다.
‘집’은 더 이상 한 개인의 사적 공간이 아니라,
별빛이 전등처럼 켜지고, 바람이 환기창이 되는 거대한 생태적 예배당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니라, 임시 세입자로 살아간다.
이 인식은 ‘창조질서에 대한 겸손’이자,
신학적으로는 창조 신앙의 시적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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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이코스대학교의 이름, 신학적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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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이코스대학교
(Oikos University)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오이코스는 곧 “하나님의 집”이며,
그 집은 음악대학, 신학대학, 한의과대학,
예술대학이 한 몸처럼 공존하는 영적 복합체다.
즉, 학문과 예술, 영성과 인문이 하나의 집 안에서 밥을 나누는 것이다.
박성진 시인의 시는 이 대학의 상징적 철학과 절묘하게 겹친다.
그의 시 속에서 인간은 지구라는 하숙집의 세입자,
신은 이 집의 보이지 않는 건축가이며,
예술은 그 집의 인테리어를 꾸미는 빛의 장인정신이다.
‘오이코스’란 결국, 신이 꾸린 집 안에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성찬의 장면이다.
이 신학적 ‘집의 개념’은 오이코스대학교가 추구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창조 질서 교육’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학문은 머리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과 감사의 하숙비로 드려야 할 영적 행위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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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하숙인, 인간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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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월세를 받아가고, 달은 창문세를 받는다.”
이 한 줄은 시적 재치 이상의 철학을 품는다.
태양의 빛은 우리가 내는 ‘전기세’이고,
달의 인력은 조석(潮汐)이라는 우주의 임대차 계약이다.
이 얼마나 근사한 우주적 유머인가.
박성진 시인은 인간의 ‘소유욕’을 해학으로 해체한다.
우리는 세상을 정복했다고 말하지만,
결국 우주의 주인은 태양과 달,
즉 신이 설계한 질서 그 자체다.
이 시는 ‘지구적 겸손’을 회복시키는 성찰의 장이다.
시인의 유머는 가벼움이 아니다.
깊은 깨달음을 위한 웃음의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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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수도관과 천둥의 독촉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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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하늘의 수도관이 새는 것이고,
천둥소리는 은행에서 독촉전화가 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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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머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그 속에는 기후 위기의 예언자적 통찰이 있다.
비는 생명의 공급이지만, 때로는 홍수와 재앙으로 변한다.
하늘의 수도관이 막히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 환경을 더럽힌 탓이다.
천둥소리의 독촉전화는 우리에게 ‘지구세를 연체하지 말라’는 경고다.
즉, 오이코스(집)는 자연이 빌려준 집이고,
그 계약서는 양심과 생태윤리로 쓰여 있다.
박성진 시인은 그 계약 조항을 시로써 다시 낭독하였다.
“지구는 신의 하숙집이니, 인간은 관리인이 되어라.”
이것이 그의 ‘오이코스 신학’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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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학의 미학, 건축으로 본 우주>
“ 오이코스 바다는 부엌, 숲은 거실, 하늘은 천장, 바람은 환기창이다.”
이 연은 예술적 상상력의 정점이다.
우주를 하나의 예술적 건축물로 바라보는 시적 설계도이다.
그곳에서 예술가란 창조의 손끝을 이어받은 장인이다.
바다는 물의 색채로 그림을 그리고,
숲은 소리의 음향학으로 음악을 만든다.
바람은 무용수처럼 공기를 흔들며 공간을 살아 있게 한다.
오이코스대학교의 예술대학은
바로 이런 우주적 예술관을 체현한다.
예술은 신의 숨결을 번역하는 언어이자,
자연과 인간의 대화를 복원하는 신성한 기술이다.
박성진 시인의 시는, 예술이야말로
신학의 가장 아름다운 방이라는 것을 시적으로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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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미학, 코이노니아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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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꽤 괜찮은 공동생활 아닌가.”
이 문장은 인간과 자연, 신과 생명체 모두를 향한 포용의 미소다.
기독교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즉 영적 교제의 개념이
이 시에서는 생태적 연대로 확장된다.
나무가 내 대신 숨을 쉬고, 구름이 빨래를 말려주는 세상.
이것이야말로 오이코스적 평화, 즉 피조물의 상호부조다.
박성진의 언어는 환경운동보다 더 시적이고,
설교보다 더 깊이 있는 ‘공존의 복음’을 전한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신학과 생태, 철학과 시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 웃는 우주의 공동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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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의 시학, “빛으로·숨으로·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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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마지막 전조는 삼위일체의 시학이다.
“빛, 숨, 사랑”은 곧
성부·성령·성자의 시적 은유이다.
빛은 창조의 언어,
숨은 성령의 기운,
사랑은 구속의 목적.
이 세 단어는 신학적 교리의 압축이며,
동시에 인간이 하숙비로 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헌금이다.
박성진 시인은 종교적 권위 대신 생활의 신학을 보여준다.
그의 오이코스는 교회가 아니라,
매일의 밥상과 하늘 아래 펼쳐진 기도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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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대학의 사유, 존재의 겸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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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사유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보다 더 넓다.
그는 “나는 숨 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철학을 바꾼다.
오이코스의 철학은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한다.
우주 중심, 혹은 공존 중심의 윤리학으로 전환시킨다.
플라톤이 ‘코스모스’를 질서 있는 집이라 불렀듯,
박성진 시인의 시는 ‘질서 속의 유머’를 통해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새로 정립한다.
겸손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를 지키는 윤리적 책임이다.
그의 철학은 웃음으로 완성되는 겸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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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대학의 울림, 별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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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 “별 하나가 속삭인다.”
이 구절은 시의 엔딩이 아니라, 새로운 오페라의 프롤로그다.
우주가 거대한 성가대라면,
별들은 각기 다른 음색으로 신을 찬양하는 합창단원이다.
박성진 시인은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시적 청음 자다.
별의 속삭임을 ‘음악적 계시’로 전환시키며,
모든 피조물이 하늘의 악보 속에서
하나의 음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시인의 언어는 음악처럼 울리고,
그 울림은 영혼의 청소처럼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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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과 경건, 웃음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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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매력은 바로 경건한 해학이다.
하늘의 수도관, 천둥의 독촉전화, 달의 창문세.
이 기발한 이미지들은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 웃음 뒤에는 경건한 자각이 숨어 있다.
웃음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유머를 이해하는 인간의 겸손한 반응이다.
박성진 시인의 해학은 예언자적 풍자와 다르다.
그의 웃음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용서하는 미소이다.
그 안에서 신은 ‘웃는 창조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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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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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코스, 인간과 신의 공동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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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오이코스이며, 지구는 그 속의 하숙집.
이 선언은 현대 신학의 요약이자,
예술과 철학이 합창하는 문명의 복음이다.
박성진 시인의 시는 신의 집을 찬양하면서도,
그 안에 사는 인간의 작은 발자국까지 놓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시인은‘해학적 유머’로써 높이를 낮추고, 예술적 언어로 우주를 집으로 표현하며 지구에 거주하는 동안에 삶에 대한
예술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미학적 질서와 행복을 다양한 해학적 표현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