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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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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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시인
사랑이란 참 묘하다.
처음엔 꽃잎처럼 살며시 오더니,
떠날 땐 문을 쾅 닫고 떠난다.
그땐 눈빛 하나에도 세상이 반짝이고,
이름만 불러도 달이 뜨던 사람.
이제는 그 이름만 들어도
휴대폰 요금이 생각난다.
왜 말이 없냐고?
생각 중이야.
“생각은 무슨, 마음은 벌써 딴 데 있잖아요.”
그 말에 웃으면서도, 속으론 눈물이 난다.
헤어진 뒤엔
사진을 본다.
‘저때는 왜 그렇게 행복했을까’
혼자 중얼거리며, 웃는다.
사랑은 참,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연극 같다.
막이 내린 줄 알았는데
커튼콜이 다시 올라온다.
그래도 좋다.
그 어리석음 덕에
봄은 다시 오고,
가슴은 여전히 젊다.
모든 것이
사람답게 사는
얄궂은 사랑도
추억이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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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 얄궂은 사랑, 인간의 해학과 철학적 유머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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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얄궂음’ 웃음과 눈물의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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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사랑〉은 인생의 가장 따뜻하면서도 허무한 감정인 ‘사랑’을 해학의 언어로 풀어낸 시다.
사랑을 철학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일상의 감각으로 번역했다는 점에서 이 시는 ‘감정의 철학서’다.
‘묘하다’라는 한마디로 시인은 사랑의 본질을 정의한다. 사랑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고, 경험으로만 해석되는 영역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 단어 하나에 시인은 인간의 모순된 정서, 즉 설렘과 후회, 기쁨과 허무, 희망과 체념의 복합 감정을 집약한다.
‘얄궂음’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다.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살아 있는 자만이 얄궂게 웃고, 울고,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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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과 문, 감정의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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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꽃잎처럼 살며시 오더니, 떠날 땐 문을 쾅 닫고 떠난다.”
이 한 줄은 감정의 물리학이다. 시작은 섬세하고 미세한 ‘촉감’으로 오지만, 끝은 폭발음과 함께 닫힌다.
박성진 시인은 ‘꽃잎’과 ‘문’을 통해 사랑의 시작과 끝을 시청각적으로 대비시킨다.
꽃잎의 고요함은 첫사랑의 조심스러움, 문을 닫는 소리는 관계의 단절음을 의미한다.
이 두 이미지의 충돌은 사랑의 시간 구조를 보여주었다. 감정은 항상 서정으로 시작해 현실로 끝난다.
사랑의 출발은 시적이지만, 그 결말은 생활적이다. 박성진 시인은 이 사실을 냉소 없이 웃음으로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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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요금’ 해학의 핵심, 시대의 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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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 이름만 들어도 휴대폰 요금이 생각난다.”
이 문장은 이 시의 중심축이자, 박성진 시인의 해학 세계를 대표한다.
사랑의 추억을 ‘요금’이라는 소비의 은유로 바꾼 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사랑이 얼마나 물질화·일상화되어 있는지를 폭로하는 풍자다.
‘휴대폰 요금’은 연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연결의 비용이기도 하다.
즉, 사랑은 소통의 예술이지만, 동시에 감정의 요금제를 가진 계약관계다.
박성진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슬픔 대신 해학으로 승화한다.
이 해학은 냉소가 아니다. 사랑의 실패를 삶의 연료로 바꾸는 긍정의 연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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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무슨” 인간적 대화의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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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무슨, 마음은 벌써 딴 데 있잖아요.”
이 구절은 시적 화법이 아닌 생활 언어의 시학이다.
그 안에는 인간의 진실이 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이미 멀어진 마음.
이 대화는 단순한 연애의 대사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전형적 순간이다.
우리는 종종 마음이 식은 뒤에도 예의를 지키기 위해 ‘생각 중’이라 말한다.
박성진 시인은 그 허위의 시간을 정확히 포착하였다.
그는 인간의 연약함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가식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본다.
웃으며 눈물 흘리는 이 장면은, 사랑이란 감정의 윤리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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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회상 기억의 프레임 속에 남은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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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뒤엔 사진을 본다.”
사진은 시간의 잔해이자, 감정의 보관함이다.
박성진 시인의 시에서 사진은 사랑의 ‘묵은 온기’를 담고 있는 매개체다.
‘왜 그렇게 행복했을까’라는 문장은 후회의 문장이 아니라, 감정의 미학적 재생이다.
그 시절의 행복이 지금의 자신을 살게 하는 힘이 되었음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울지 않고, 웃는다.
이 웃음은 체념이 아니라 회복이다.
과거를 애도하지 않고, 그것을 품에 안아버리는 태도, 바로 이것이 해학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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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연극 같다” ― 인간 존재의 희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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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시인은 사랑을 연극적 은유로 옮긴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연극 같다.”
사랑의 본질은 ‘자기 연출된 고백’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이라는 무대 위에서 배우처럼 연기한다.
감정의 진심조차, 때론 타인의 시선 속에서 연출된다.
박성진 시인은 그것을 조롱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임을 인정한다.
커튼콜이 다시 올라온다는 구절은, 사랑이 끝나도 인간은 또다시 사랑의 무대로 돌아간다는 인간적 순환의 서정이다.
이것은 허무가 아니라 생명의 반복 의지이며, ‘어리석음 속의 숭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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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다”철학적 해학, 어리석음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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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리석지만, 그 어리석음이 인생을 빛낸다.
시의 마지막 구절 “그래도 좋다”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선언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실수와 상처, 후회와 미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박성진 시인은 그 어리석음을 ‘봄’으로 비유한다.
사랑의 계절은 돌아오고, 인간의 가슴은 다시 젊어진다.
이 구절은 해학이 단순한 유머가 아닌 철학적 생명의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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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얄궂음’의 언어철학, 미움 속의 사랑, 슬픔 속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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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다’는 말에는 감정의 다층적 진동이 있다.
그 안에는 짜증, 그리움, 애정, 원망이 모두 들어 있다.
박성진 시인은 이 복합적 정서를 사랑의 본질로 본다.
사랑은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얄궂은 곡선’을 그리며 인간을 성장시킨다.
그래서 그는 ‘얄궂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인간의 따뜻한 불완전함을 본다.
이 단어 하나에 박성진 시인의 시학이 함축되어 있다.
바로 모순을 끌어안는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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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의 문학사 슬픔을 견디는 웃음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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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해학은 단순한 익살이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견디는 영혼의 기술이었다.
조선 후기 민중소설에서 김유정의 풍자에 이르기까지, 해학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박성진 시인은 그 계보를 현대 언어로 되살렸다.
〈얄궂은 사랑〉은 웃음으로 눈물을 씻는 시다.
그 웃음은 자조가 아니다. 연민과 회복의 철학이다.
시인은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것을 유머로 전환함으로써
‘한(恨)’을 ‘해학(諧謔)’으로 치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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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패에서 성숙으로의 인간의 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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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실패한 사랑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성장 서다.
‘사랑의 끝’을 ‘인생의 시작’으로 바꿔놓는 시인의 시선은 성숙의 징표다.
사랑의 상처는 인간의 감정 근육을 키운다.
박성진 평론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슬픔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젊음으로 환원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힘’이다.
마지막 행 “추억이며 힘이다”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
사랑의 체험을 인생철학으로 승화한 인문학적 선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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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해학, 인간을 구원하는 마지막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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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사랑〉은 단지 사랑 시가 아니다.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유머학이다.
슬픔 속에서 웃는 법, 실패 속에서 살아남는 법, 후회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법을 가르친다.
박성진 시인의 해학은 가벼운 풍자가 아니다. 인류 보편의 정서는 “눈물 속의 미소”를 담는다.
사랑이 떠나도, 웃음은 남는다.
그 웃음은 희극이 아니라 구원이다.
결국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란, 끝나도 다시 시작되는 인생의 연극이며,
그 얄궂음 속에서도 인간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삶은 희극이며 연극배우로 각각의
연기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결론>
〈얄궂은 사랑〉은 박성진 시학의 압축된 표본이자,
현대 해학시의 결정판이다.
웃음과 눈물, 철학과 생활, 상처와 회복이
한 편의 짧은 시 안에서 완벽히 공존한다.
그리하여 이 시는 ‘사랑의 기록’을 넘어,
‘인간다움의 찬가’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