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이인애 시인-지네》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지네〉


이인애 시인


천형인가 신의 가호이련가

쫓기듯 도망치듯 늘 허둥지둥


천 개의 노를 저어 달려 나가자

빛을 갉아먹어버린 어둔 공간 속

머리 푼 아라크네가

영원토록 젖지 않을

꿈 한 자락 에둘러 짜던 곳


날 선 눈초리에 얼어붙은 몸뚱어리

영겁의 족쇄라도 채워진 걸까

기어도 걸어도 모로 눕는 진자리


수많은 발길질로 벽을 밀어 올려도

열자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밝은 곳에 설 수 없어 멍든 가슴

너는 정작 길어서 슬픈 생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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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 길어서 슬픈 인간의 초상》




<서론>

지네, 인간의 그림자를 닮은 존재


이인애 시인의 시 〈지네〉는 단순한 생태적 관찰이 아니다.

이 시는 곤충의 형태를 빌려 인간 실존의 고통을 함축적으로 은유한 작품이다.

지네는 무수한 다리로 기어가지만, 결코 빛에 닿지 못한다.

그 모습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만든 벽 안에 갇혀 사는 인간의 초상이다.

시인은 이 생명체를 통해 움직임 속의 정지, 자유 속의 속박, 생명 속의 슬픔을 포착한다.

“길어서 슬프다”는 말은 육체적 길이보다,

의미가 길어질수록,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아프게 되는 인간의 내면 구조를 뜻한다.

이 시는 그 철학적 인식을, 마치 지네의 몸처럼 구불구불한 리듬 속에 새겨 넣는다.



> 천형인가 신의 가호이련가

쫓기듯 도망치듯 늘 허둥지둥



이 시의 첫 행은 곧바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불안 속에 던져 넣는다.

‘천형’(하늘의 형벌)과 ‘가호’(신의 보호)는 정반대의 개념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은 축복이자 징벌이기 때문이다.

“쫓기듯 도망치듯 허둥지둥”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불안의 리듬이다.

지네의 수많은 다리가 허둥대는 모양처럼,

인간도 삶이라는 미로 속에서 늘 초조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해방이 아니다.

자기 안의 더 깊은 감옥으로의 진입이다.




<둘째 연은 아라크네의 거미줄과 운명의 그물>


> 천 개의 노를 저어 달려 나가자

빛을 갉아먹어버린 어둔 공간 속

머리 푼 아라크네가

영원토록 젖지 않을

꿈 한 자락 에둘러 짜던 곳


여기서 시인은 신화의 차원을 빌려 인간의 운명을 확장한다.

‘아라크네’는 신의 질투로 거미가 된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솜씨로 신을 모방하다가, 결국 형벌로 변신당했다.

시인은 지네의 이미지를 이 아라크네의 세계와 병치한다.

“천 개의 노”는 지네의 다리이자 인간의 욕망이다.

더 나은 세계로 가기 위해 저어 나아가지만,

그 노력은 결국 ‘빛을 갉아먹는 어둠’으로 귀결되었다.

즉, 인간의 문명은 스스로의 탐욕으로 빛을 훔치고,

그로 인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젖지 않을 꿈 한 자락”은

결코 현실에 닿지 않는 건조한 환상,

즉, 인간의 끝없는 자기기만의 상징이다.



<셋째 연, 정지된 몸, 무력한 자유>


> 날 선 눈초리에 얼어붙은 몸뚱어리

영겁의 족쇄라도 채워진 걸까

기어도 걸어도 모로 눕는 진자리


이 부분은 시의 중심적 긴장을 이룬다.

눈은 살아 있지만, 몸은 얼어붙어 있다

의지는 있으되 행동은 멈춘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이 외부의 억압과 자기 두려움으로 인해 마비된 형상이다.

‘영겁의 족쇄’라는 표현은 불교적 시간 개념을 불러온다.

한 생이 아닌, 영원히 반복되는 숙명의 고통이다.

기어도 걸어도, 결국 제자리다.

이 구절은 실존적 부조리를 완벽히 형상화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는 냉혹한 인식,

그것이 이 시의 실존적 통증이다.


<넷째 연은 벽과 우물, 문명의 갇힘>


> 수많은 발길질로 벽을 밀어 올려도

열자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밝은 곳에 설 수 없어 멍든 가슴

너는 정작 길어서 슬픈 생명체



‘벽’은 사회적 제도와 운명의 경계이며,

‘우물’은 인식의 한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발버둥 치며 벽을 밀어 올리지만,

결국 우물 안이라는 구조 속에서 다시 갇힌다.

“밝은 곳”은 진리, 자유, 신성의 상징이지만

그곳에 닿지 못한 채 멍들어버린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마지막 구절 “너는 정작 길어서 슬픈 생명체”는 시 전체의 핵심이다.

길다는 것은 가능성이자 부담이다.

지네는 다리가 많기에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지만,

그만큼 더 많은 다리로 자신을 얽어맨다.

이 말은 곧 지식이 깊을수록, 욕망이 클수록 더 고통스러워지는 인간의 운명을 말한다.

길이란 자유의 척도가 아니라, 고통의 밀도이다.



<언어 구조와 리듬, 움직이는 정적>


〈지네〉는 형태적으로도 지네를 닮았다.

짧은 행이 반복되고, 구절들이 이어지며 구불구불 전개된다.

‘쫓기듯, 도망치듯, 허둥지둥’의 리듬은 불안의 심박,

‘기어도, 걸어도, 눕는’의 반복은 실존의 순환 구조를 나타낸다.

이 리듬은 단지 음성적 효과가 아니다.

시 전체의 존재론적 호흡을 이루고 있다.



<상징 해석, 얽힌 삶, 스스로의 족쇄>


이 시의 상징은 세 가지 축으로 작동한다:

지네(육체적 불안), 아라크네(정신적 오만), 우물(사회적 한계).

이 세 요소는 따로가 아니라 서로를 묶어 놓는 끈으로 작용한다.

지네는 살아남기 위해 기어가는 몸,

아라크네는 창조와 욕망으로 신을 넘어서려는 영혼,

우물은 그 모든 시도를 한정시키는 세상의 벽이다.

이 셋이 만나면, 인간의 전체가 된다.

인간은 몸과 욕망과 제도 속에 얽힌 존재이다.

스스로의 다리로 벽을 짓고, 스스로의 실로 제 목을 맨다.

이 시의 진정한 비극은 그 모든 얽힘이 바로 ‘살아 있음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즉, 고통이야말로 생의 본질이다.



<철학적 맥락 실존의 윤회와 침묵>


〈지네〉의 세계에는 구원이 없다.

빛은 닿지 않고, 신은 침묵한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으로 끝내지 않는다.

“멍든 가슴”은 아직 뛰고 있고,

그 멍 자국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 시의 어조는 절망을 통과한 차분한 인식이다.

그것은 카프카의 ‘성(城)’처럼 닿을 수 없는 자유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결국 스스로의 굴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벗어날 수 없다면 그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마지막 품격이다.



<길어서 아름다운, 길어서 아픈 존재>


〈지네〉는 인간의 초상을 함축한 시다.

우리는 모두 다리를 수백 개나 가진 지네처럼,

욕망과 기억과 두려움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아무리 움직여도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자기 그림자와 싸우며 살아간다.

이인애 시인은 그 비극을 슬픔이 아닌 인식의 언어로 승화시켰다.

〈지네〉는 우리에게 말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끝없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지네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거울이며, 움직이는 철학의 형상이다.

그리하여 시는 마지막 행에 이른다.

“너는 정작 길어서 슬픈 생명체.”

이 한 줄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삶의 길이만큼 고통이 길고,

고통의 깊이만큼 존재는 빛난다.



이 완성본은 이인애 시 〈지네〉의 철학적, 형상적 중심을 가장 깊게 해석한 문화평론의 결정판입니다.

지네는 더 이상 곤충이 아니라,

인간이 걸어온 시간의 길이와 그 안의 슬픔을 짊어진 상징적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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