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유숙희 시인-들깨향 가을》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들깨향 가을〉

유숙희 시인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처연하게 핀 국화꽃들이

발길을 멈추게 하고,

어스름한 빛이

밀려오는 저녁시간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들깨향이 번져 와

향기로운 저녁 시간


두둥실 뜬 보름달

고소한 냄새 따라 내려와

점점 크게 보이는 착각

아, 향기로운 가을밤


저녁식사는 삭힌 들깻잎

들기름에 부친 부침개,

가을향 한입 가득한 행복

내 마음도 보름달.


**********


〈평론〉 “향기로 물든 삶, 가을 저녁의 따뜻한 시학”


문화평론가 박성진



<서정의 원점 ‘들깨향’이 불러낸 기억의 문턱>


유숙희 시인의 〈들깨향 가을〉은 향기로 시작되는 시다.

그 향은 단순히 음식의 냄새가 아니라, 세월이 몸에 밴 삶의 냄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라는 첫 구절은 도시의 거리도, 화려한 풍경도 아니다. 그저 한적한 마을길의 오후, 인간의 체온이 남아 있는 풍경이다.

국화꽃이 “처연하게 핀” 모습은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정조를 드러낸다.

그 처연함은 슬픔이 아니라, 오래 묵은 인생의 순한 맛이다.

시인은 ‘보이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을 더 신뢰한다.

그래서 시는 곧 냄새와 온도의 언어로 전환된다.



<시각에서 후각으로, 감각이 옮겨지는 순간>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 들깨향이 번져 와”

이 대목은 시의 중심축이다.

국화가 시각의 세계라면, 들깨향은 감각의 세계이다.

그 향기가 불어오는 순간, 시인은 자기 안의 추억으로 들어간다.

이때의 들깨향은 단지 향기가 아니라 기억의 통로다.

어머니가 밭에서 따온 들깨잎, 시골집의 연기, 가을 저녁의 고소한 냄새,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시간으로 되살아난다.

시인은 향기를 통해 과거의 온기를 현재로 끌어올린다.

이 전환은 감각의 이동이자, 삶의 깊이로 들어가는 문이다.



<향기의 철학 냄새로 존재를 말하다>


〈들깨향 가을〉은 ‘냄새’라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들깨향은 인간의 노동이 만들어낸 냄새이자,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향이다.

기름 짜는 냄새, 볕에 마른 잎의 냄새, 바람이 섞인 흙냄새가 함께 어우러진다.

이 향은 단순히 미각의 예고가 아니라, 삶의 미학적 향유다.

문명과 소음 속에서 사라져 버린 ‘냄새의 기억’을 복원하는 시,

그것이 유숙희 시의 본질이다.


시학적으로 보자면 이 시는 ‘청각적 리듬’보다 ‘후각적 리듬’으로 움직인다.

향기가 불어올 때마다 리듬이 느려지고, 독자의 숨결이 고요해진다.

이 시의 시간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냄새가 퍼지는 시간’이다.

그 느린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향기로 존재함을 다시 느낀다.



<달빛의 착각 공감각의 정점>


“두둥실 뜬 보름달 / 고소한 냄새 따라 내려와 / 점점 크게 보이는 착각”

이 구절은 시의 정서가 절정에 이르는 부분이다.

시인은 향기를 시각으로 번역한다.

달이 향기를 따라 내려온다는 상상은 공감각(synaesthesia)의 표현이다.

이때 보름달은 단지 하늘의 달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의 달이다.

향기가 강해질수록 달이 커지는 ‘착각’은 곧 ‘내면의 충만함’이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 감각과 상상을 하나의 장면으로 묶는다.

그 착각의 순간, 현실은 사라지고 오직 시적 체험만 남는다.



<부엌의 철학 일상의 숭고함>


“저녁식사는 삭힌 들깻잎 / 들기름에 부친 부침개”

이 장면은 소박하지만 놀라운 힘을 지닌다.

시인은 부엌을 성소(聖所)처럼 다룬다.

들기름에 부친 부침개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 세대의 삶과 인내, 그리고 사랑이 스며 있는 상징이다.

삶의 고단함을 이겨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생활의 시학이다.

이 장면에서 시는 ‘가을의 철학’으로 변모한다.

즉, 가을은 시인의 눈에 계절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 그 자체이다.



<한입의 행복 존재의 충만>


“가을향 한입 가득한 행복”은 시 전체의 핵심 문장이다.

행복이란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삶의 냄새를 받아들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이 있다.

한입의 부침개 속에서 시인은 계절을, 세월을, 그리고 자신을 맛본다.

그것이 곧 ‘가을향의 존재론’이다.

가을은 끝이 아니라 충만이며, 시인은 그 충만 속에서 평화를 얻는다.



<내 마음도 보름달, 원형의 회복>


마지막 구절 “내 마음도 보름달”은

시적 정서가 완전히 원형으로 회복되는 순간이다.

보름달은 가득 참이자, 인간 마음의 완결이다.

시인은 들깨향에서 출발해 결국 마음의 환한 빛으로 돌아온다.

즉, 향기의 여정이 마음의 여정으로 닿는다.

이 한 줄은 ‘향기로부터 시작된 인간학’의 결론이자,

삶이 결국 빛으로 돌아간다는 조용한 신앙고백이다.



<언어의 절제 진정성의 미학>


유숙희 시인의 언어는 꾸밈이 없다.

그 담백함이 바로 시의 품격이다.

요란한 수식도, 인위적 운율도 없다.

그러나 그 절제 속에 삶의 진정성이 흐른다.

이 시는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로 빛나는 작품이다.

시를 읽는 동안 독자는 어느새 자기 집의 부엌,

자기 기억의 가을로 들어가게 된다.



<향기와 기억의 서정시>


〈들깨향 가을〉은 향기라는 미묘한 감각을 통해

시간과 기억, 일상과 존재를 하나로 엮은 작품이다.

이 시는 가을의 황혼을 노래하면서도,

결코 쓸쓸하지 않다.

그 속에는 “향기로운 행복”이라는 조용한 선언이 있다.

유숙희 시인은 평범한 일상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능력,

그리고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시심(詩心)을 지녔다.


유숙희 시인의 들깨향은 독자의 마음에도 오래 남는다.

그 향은 곧 삶의 향기이기 때문이다.

그 향을 기억하는 한,

우리의 가을은 아직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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