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짜장면, 검은 소스 속의 시간과 인간》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짜장면, 검은 소스 속의 시간과 인간〉


문화평론가 박성진



짜장면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 안에는 한 세기의 시간이 녹아 있다.

한국의 근대화, 이민의 여정, 전쟁의 상흔, 노동의 땀, 그리고 사랑의 추억이 함께 숨 쉬고 있다.

검은 춘장은 밤처럼 깊고, 그 안에 비친 인간의 얼굴은 시대마다 다르다.

어떤 시절에는 그것이 축하의 음식이었고,

어떤 날에는 가난을 달래던 위로의 맛이었다.

식탁 위의 짜장면은 하나의 우주다.

하얀 그릇 위에 놓인 검은 소스, 그 선명한 대비 속에는

밝음과 어둠, 희망과 체념, 인간의 모든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다.

한 젓가락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 안에서 삶의 명암이 느릿하게 풀려 나온다.


그 시작은 인천의 항구였다.

바다를 건너온 산둥의 이주민들이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만들던 짜장면이

한국 땅에서 다시 태어났다.

짜장면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그리움이자,

새로운 땅에서 뿌리내리려는 생존의 상징이었다.

좁은 부두의 식당에서 면을 삶고 검은 장을 끼얹던 손길,

그 손끝에는 노동의 땀과 바다의 바람이 배어 있었다.

그들은 모국을 떠나왔지만,

그들의 그릇 안에는 여전히 고향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이국의 항구에서 태어난 그 음식은

훗날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이주와 ‘정착’의 상징으로 남았다.


세월이 흘러 산업화의 바람이 불던 시절,

짜장면은 서민들의 외식의 상징이 되었다.

졸업식 날, 이사하는 날, 혹은 작은 축하의 자리에

늘 짜장면이 있었다.

그 한 그릇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가난했던 시절의 꿈을 위로하는 기념식의 음식이었다.

검은 소스 속에는

“우리도 이만큼 살게 되었구나” 하는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그 소스는 도시의 매연이자 산업화의 그늘을 닮았지만,

그 속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은 여전히 반짝였다.

입가에 묻은 검은 자국은

가난을 이겨낸 사람들의 명예로운 흔적이었다.


짜장면은 사랑의 음식이기도 하다.

첫 데이트의 설렘, 이별의 쓸쓸함,

퇴근길 혼자 먹던 늦은 저녁의 고독까지,

모든 감정이 그 그릇 속에 얽혀 있다.

뜨거운 국물 대신, 미지근한 소스 위로

사람의 마음이 천천히 식어갔다.

검은 소스는 감정의 그림자다.

누구의 미소인지, 누구의 눈물인지 모르게 뒤섞인다.

그래서 짜장면은 혼자 먹어도 외롭지 않은 음식이다.

함께 먹어도 각자의 생각이 고요히 흩어지는,

그것이 짜장면이 가진 묘한 인간미다.


영화와 문학 속에서도 짜장면은 오래된 조연으로 등장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것은 형사들의 허기를 달래는 노동의 음식이었고,

임권택의 영화에서는 권력과 야망의 상징이었다.

이창동의 영화에서는 상실을 견딘 사람의 일상을 되찾는 회복의 음식이었다.


문학 속에서도 짜장면은 한국인의 정서를 품은 하나의 풍경이다.

조세희의 노동자, 박완서의 도시 여성, 이청준의 방황하는 인물들 속에는

언제나 짜장면 한 그릇이 놓여 있다.

그 음식은 민중의 미학이며,

한 그릇의 음식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주문할 수 있는 시대다.

십 분이면 짜장면이 도착한다.

그러나 그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짜장면의 진짜 의미를 잃었다.

예전엔 짜장면을 먹으며 사람을 만났지만,

지금은 짜장면을 먹으며 사람을 잃는다.

한 그릇의 음식이 공동체의 온기에서

디지털의 고독으로 옮겨 간 것이다.

이제 짜장면은 추억의 맛이다.

젊은 세대에겐 단순한 메뉴일지 몰라도,

기성세대에게는 눈물의 맛, 가족의 향기다.

그 향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짜장면의 검은빛은 단순한 색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혼합물,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이 한데 어우러진 인간의 색이다.

춘장의 쓴맛과 설탕의 단맛, 면의 탄력은

삶의 조화와 불협화음을 함께 품는다.

짜장면은 혼합의 미학이다.

완전하지 않기에 인간적이고,

불완전하기에 아름답다.

그 한 그릇 속에서

우리는 삶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이제 짜장면은 우리 모두의 기억이 되었다.

그릇 속 검은 우주를 바라보며

우리는 어린 날의 웃음과 부모의 손을 떠올린다.

그 면발은 세월을 건너,

지금도 마음의 깊은 곳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다.

짜장면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검은 소스 속에서 여전히

한 인간의 삶이 익어가고, 식어가고, 다시 시작된다. 그것이 짜장면이다.

검고 따뜻한 음식으로 한국의

사랑받는 우리의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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