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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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蘭을 키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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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에 납북되신 할아버님 民世 安在鴻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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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혜 초 시인
흙이 아니어든 돌밭이라도
돌밭이 아니어든 바윗돌 틈새에서라도
햇빛보다는 차라리
바람 속에서
잎잎을 키워가며 꽃 피워내는
질기디 질긴 목숨의
서귀포 風蘭 한 포기
건드리면 그 즉시 터져버릴 것 같은
여리디 여린 겉보기와는 달리
철사줄처럼 강파른
실핏줄 몇 가닥으로
그래도 믿음, 그래도 소망,
그래도 사랑의 꽃 한 송이
향그러이 피어내기 위해
마지막 숨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까지
저 눈물겹도록 어기찬
푸르름에의 意志!
南과 北으로 굳어져가는
한 핏줄 다시 이어가려 하는
이 나라, 이 겨레의
恨맺힌 염원이리니
山 설고 江 설은
북녘 땅 어느 冬天 아래
아직도 두 눈 홉뜨시며
잠 못 이루어하실
아드윽한 그 모습, 그 목소리
할아버님, 당신의 한 줌
시퍼런 不歸의 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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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밭 위의 믿음, 바람 속의 생명, 한 포기의 풍란이 남긴 인간의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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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蘭을 키우며〉는 생명과 믿음, 그리고 분단의 상처를 하나의 시학으로 통합시킨 명작이다.
이 시는 단순한 식물 묘사가 아니다. 역사의 결핍을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 기록이다.
시의 배경에는 ‘6·25 납북’이라는 가족사적 비극이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슬픔을 애상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생명의 형이상학으로 전환시킨다.
‘풍란’은 흙이 아닌 바위틈, 바람 속에서도 피어나는 존재다.
이 존재의 방식은 바로 납북된 조부, 돌아오지 못한 영혼,
그리고 남북으로 갈라진 한 민족의 생존 구조를 그대로 닮았다.
시인은 풍란이라는 생명체를 통해,
“이 땅의 인간이 어떻게 견디고 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시의 중심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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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탄생, 결핍의 공간에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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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아니어든 돌밭이라도 / 돌밭이 아니어든 바윗돌 틈새에서라도”
이 구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시적 리듬으로 반복된 이 구조는 부정 속의 긍정이다.
흙이 없다는 것은 생명의 토양이 사라졌다는 뜻이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곳에서 생명을 상상한다.
그것은 존재론적 역설, 즉 없음 속에서 있음이 자란다는 인간의 근원적 체험을 상징한다.
‘햇빛보다는 차라리 바람 속에서’라는 구절은
빛이라는 문명적 안정보다, 바람이라는 고난의 공간을 택하는 의지다.
이 선택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신앙의 태도이며,
삶을 ‘편안함의 온실’이 아니라 ‘바람의 학교’로 보는 시인의 인식이 깃들어 있다.
결국 이 첫 연은 신앙의 선언이자 생명의 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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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풍란의 장소성, 바람의 남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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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두 번째 연에서 등장하는 “서귀포 風蘭 한 포기”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서귀포’라는 지명은 남한의 끝이며, 민족 분단의 남단 경계선이다.
풍란은 그 끝에서 피어난다.
즉, 이 시는 남쪽 끝에서 북쪽을 향해 기도하는 한 영혼의 형상이다.
‘질기디 질긴 목숨’은 단순한 생명력의 수식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윤리적 의지를 드러낸다.
풍란은 돌 위에서도 자라고, 바람 속에서도 견딘다.
그 생명은 외형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지속성으로 존재한다.
시인은 그것을 ‘한 포기’라는 단어로 축소해 표현함으로써,
개인의 미소함이 곧 우주의 전체성과 닿는다는 철학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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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림과 강함, 인간의 실핏줄로 이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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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드리면 그 즉시 터져버릴 것 같은 / 여리디 여린 겉보기와는 달리 / 철사줄처럼 강파른 / 실핏줄 몇 가닥으로”
이 대목은 풍란의 존재론적 비밀을 드러낸다.
시인은 외적 연약함 속의 내적 강도를 탐구한다.
여리지만 부서지지 않고, 흔들리지만 뿌리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며 시인의 신앙이다.
‘철사줄처럼 강파른 실핏줄’은 정신의 뿌리, 인간의 신경망을 은유한다.
그것은 혈육으로 이어진 조부의 핏줄이며, 동시에 민족의 생명선이다.
풍란의 실핏줄은 현실에서는 끊어진 남북의 연결선을 대신한다.
이 대목은 시 전체의 숨은 심장부다.
고통 속의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끊어짐 속에서도 연결’을 꿈꾸는 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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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의 신학으로 절망을 이기는 인간의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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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믿음, 그래도 소망, 그래도 사랑의 꽃 한 송이”
이 반복은 절망 이후의 언어다.
‘그래도’는 현실의 부정과 동시에 정신의 긍정이다.
이 한 단어 안에 좌절의 시간과 극복의 의지가 동시에 흐른다.
시인은 신앙을 교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래도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로 정의한다.
그것은 곧 고통 속에서 피어난 행동하는 믿음이다.
풍란이 피워내는 한 송이 꽃은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니다.
세상을 향한 내적 기도다.
그 향기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돌아오지 못한 조부의 영혼을 위로하는 향기로서의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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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의 의지, 생명의 색채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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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숨결이 끊어지는 / 그 순간에까지 / 저 눈물겹도록 어기찬 / 푸르름에의 意志!”
이 구절은 시의 핵심 정점이다.
여기서 ‘푸르름’은 자연의 색이 아니다. 신앙의 색, 영혼의 색, 민족의 색이다.
푸름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생명의 빛이며,
희망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어기찬’이라는 토속어는 억세고 질긴 생명력을 표현한다.
시인은 언어의 고향을 잃지 않고,
그 고향의 말을 통해 신앙의 진실을 말한다.
바람, 흙, 돌, 피, 실핏줄, 이 모든 이미지들은 결국 ‘푸르름의 의지’로 귀결된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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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고통과 풍란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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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과 北으로 굳어져가는 / 한 핏줄 다시 이어가려 하는 / 이 나라, 이 겨레의 / 恨맺힌 염원이리니,
이 구절은 시 전체를 개인의 추모에서 민족의 역사로 확장한다.
풍란의 뿌리는 남과 북으로 나뉘었지만, 그 향기는 하나다.
시인은 한 핏줄의 재결합을 꿈꾸며,
그 염원을 ‘한 포기의 꽃’에 실어 보낸다.
풍란의 실핏줄이 서로 이어지듯,
이 겨레의 핏줄도 언젠가 다시 이어질 수 있음을 믿는다.
여기서 시는 단순히 추모의 언어가 아니라,
통일과 화해의 기도문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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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의 겨울과 불귀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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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설고 江 설은 / 북녘 땅 어느 冬天 아래 / 아직도 두 눈 홉뜨시며 / 잠 못 이루어하실”
이 대목은 조부 민세 안재홍 선생에 대한 직접적 회상이다.
그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고, 그 이름은 역사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부재를 슬픔으로만 읽지 않는다.
‘잠 못 이루어하실’이라는 구절은
그의 영혼이 여전히 깨어 있어,
이 나라의 분단과 인간의 무정을 지켜보고 있음을 뜻한다.
즉, 부재의 현존이다.
그의 혼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풍란의 푸름 속에서 계속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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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시퍼런 불귀의 넋”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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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윽한 그 모습, 그 목소리의
할아버님, 당신의 한 줌
시퍼런 不歸의 넋!”
마지막 세 행은 시 전체의 기도문이자 제문이다.
‘시퍼런’은 냉기이자 순결, 죽음이자 재생의 색이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정신의 고결함, 민족의 불멸성을 상징한다.
‘불귀’는 돌아오지 못함이지만,
시인의 시 속에서는 돌아온 현존으로 바뀐다.
풍란이 다시 피어나는 순간,
그 영혼은 부활한다.
결국 이 시는 한 사람의 조부를 추모하는 동시에,
한 민족의 잃어버린 반쪽을 불러내는 영혼의 귀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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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구조와 언어의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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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蘭을 키우며〉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생명의 탄생, 믿음과 의지, 추모와 통일.
시인은 자연에서 인간으로,
개인에서 민족으로,
그리고 땅에서 영혼으로 확장한다.
그 언어는 단정하고 조용하지만, 그 밑에는 깊은 격류가 흐른다.
어떤 과장도, 어떤 감상도 없다.
오직 진실한 기도만이 있다.
그것이 이 시가 오늘날까지 분단문학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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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바람의 신앙, 푸르름의 시학
안 혜 초 시인의 풍란은 결국 인간 그 자체이다.
흙이 없어도, 바람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으로 다시 피어나는 존재.
그것이 바로 한국 현대사의 초상이며,
시인의 영적 유산이다.
〈風蘭을 키우며〉는 안 혜 초 시인의
조부의 부재를 넘어서 민족의 상처를 껴안은 시적 성서이며,
“푸르름의 의지”는
죽음으로부터 이겨내려는 생명의 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