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
〈부활의 기도 — 카투사를 위하여〉
■
정 근 옥 시인
해 질 녘 성당의 종소리 낮게 울려 퍼질 때,
소녀의 마음은 돌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젊은 날 청춘의 빛은 너무 쉽게 부서졌다,
참다운 사랑이 아닌 욕망의 손끝에서
추억 속 깊이 박힌 그녀의 서늘한 눈빛,
반달처럼 오랫동안 그의 심장을 따라다녔다
법정의 눈빛 속에 지난날의 과거가 깨어나고,
양심 속 눈물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감옥의 창살 너머로 들려오는 찬송 소리,
속죄의 응어리 풀며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눈 덮인 시베리아 대지 위를 만발로 걸으며,
그녀는 하늘에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둠이 깊은 사막 같은 심연 속에서도,
하느님의 눈빛, 별이 되어 하늘로 타오른다
새벽의 종소리 그 가슴에 다시 울려올 때,
검은 죽음의 빛을 물리치고 부활의 꽃을 피운다
************
〈부활의 기도〉
■
문화평론가 박성진
■
서론 — 부서진 영혼이 다시 빛을 얻기까지의 긴 순례
■
정 근 옥 시인의 〈부활의 기도〉는 단순한 종교시도 아니고, 누군가의 비극을 기록한 서사도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무너진 영혼이 어떤 과정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긴 여정이다. 시의 중심에 서 있는 카투사는 하나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얼굴이기도 하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에는 청춘이 부서지는 경험, 마음이 갈라지는 경험,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다. 시는 바로 이 깊은 상처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
정 근 옥 시인은 인간을 교훈이나 심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영혼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드러날 때, 그 영혼을 감싸는 시인의 문장은 차갑지 않고 온기가 있다. 그래서 이 시는 ‘부활’이라는 종교적 주제라기보다, 인간의 회복과 치유를 노래하는 삶의 이야기로 읽힌다.
■
해 질 녘 성당의 종소리 — 모든 부활은 어둠에서 시작된다
■
시의 첫 장면은 해 질 녘이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간은 늘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여기에 성당의 종소리가 겹치자 분위기는 더욱 고요하고 쓸쓸해진다. 그런데 카투사의 마음은 그 고요함 속에서 “돌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이 표현은 그녀의 절망이 이미 오래된 것임을 보여준다. 사랑이 깨지고 삶이 무너진 사람의 마음은 무게를 가진다. 그 무게는 누구도 대신 들어주지 못한다.
■
정 근 옥 시인은 카투사의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묘사로 독자가 더 깊은 고통을 느끼게 한다. 해 질 녘 종소리는 기도와 평화를 상징하지만, 그녀에게는 겨울바람 같은 절망의 울림으로 들렸을 것이다. 부활의 시작은 언제나 희망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가장 어두운 시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
부서진 청춘과 가려진 사랑 — 욕망의 그림자
■
카투사의 청춘은 너무도 쉽게 부서졌다. 사랑을 빙자한 욕망의 손끝에서. 이 연은 많은 독자에게 가장 아프게 다가온다. 누구나 한 번쯤은 순수했던 기쁨이 누군가의 이기심이나 욕망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시인은 그 비극을 단 한 줄로 정리한다. “참다운 사랑이 아닌 욕망의 손끝에서.”
■
이 문장 속엔 울분도, 비난도 없다. 그저 사실을 말할 뿐이다. 시인의 절제미는 카투사가 겪은 깊은 상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때부터 그녀의 시간은 멈춰 있었을 것이다. 청춘은 밝고 가볍지만, 그 빛은 종종 너무 쉽게 깨어진다. 이 시는 바로 그 깨어진 자리에서 삶을 다시 조각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
추억 속 눈빛 — 기억은 상처보다 오래 남는다
■
카투사의 서늘한 눈빛은 그녀를 떠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심장을 오래 따라다닌다. 시인의 시선은 여기서 독특하게 움직인다. 피해자인 카투사의 눈빛이 오히려 상대의 죄책감을 따라다닌다는 구조는 인간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뒤틀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반달이라는 이미지는 완전하지 않은 빛, 어둠과 희망의 경계를 상징한다. 그녀의 눈빛은 완전한 증오도 아니고, 완전한 슬픔도 아니다. 그 눈빛 속엔 흔들림이 있고, 그 흔들림은 반달처럼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기억은 종종 상처보다 오래 남는다. 그리고 상처가 치유된 뒤에도 ‘기억의 그림자’는 오래도록 마음 위에 머문다.
■
법정의 순간 — 외부의 심판보다 더 깊은 내면의 심판
■
법정은 단순히 잘못을 가리는 공간이 아니다. 인간은 법의 심판보다 자기 양심의 심판을 더 깊이 느끼며 산다. 시인은 법정에서 깨어난 것은 ‘과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깨어난 것은 카투사의 내면 깊숙한 죄책감과 상처다.
■
“양심 속 눈물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
이 구절은 이 시의 심장 같은 문장이다. 인간은 자신을 마주할 때 가장 아픈 순간을 경험한다. 카투사는 죄를 씻고 싶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마침내 거울 앞에 선 듯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오래 홀로 고통을 견뎌왔는지를 알게 된다.
■
감옥의 창살 너머 들리는 찬송 — 슬픔의 무게가 기도로 변할 때
■
감옥은 외로움과 고통의 상징이지만, 때로는 인간이 가장 솔직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창살 너머 들려오는 찬송 소리는 그녀의 영혼을 깊게 흔든다. 그 소리는 죄인을 정죄하는 소리가 아니라, 슬픔을 품어주는 소리다. 찬송은 위로이고, 하느님은 벌하는 존재가 아니라 돌아오길 기다리는 존재다.
■
여기서 카투사가 내뱉는 깊은 한숨은 절망의 소리가 아니다. 오랫동안 묶여 있던 속죄의 응어리가 비로소 풀리기 시작하는 소리다. 인간은 울 때보다 한숨을 쉬는 순간에 더 많은 것을 내려놓는다. 그 한숨 속에는 지난 삶 전체가 담겨 있다.
■
시베리아 눈 위의 발자국 — 고통의 광야에서 일어나는 독백
■
시인은 시베리아를 선택했다. 시베리아는 단순한 장소를 넘어서, 인간의 고통과 외로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눈 덮인 대지 위를 맨발로 걷는다는 표현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 영혼의 자백을 상징한다.
그녀는 걷고 또 걷는다.
그 걷는 행위가 바로 기도이고 속죄이다.
그리고 그녀는 묻는다.
■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절망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움트는 자리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남은 내면의 불씨가 깨어나며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다.
■
심연의 사막 —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별빛
■
“어둠이 깊은 사막 같은 심연 속에서도
하느님의 눈빛, 별이 되어 하늘로 타오른다”
■
사막은 절망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별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인간은 가장 낮은 곳에서 빛을 보게 된다. 카투사가 본 별빛은 우주의 빛이 아니라 영혼이 발견하는 빛이다. 그것은 꾸짖는 빛이 아니라, 용서하는 빛이다. 그녀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의 삶이 완전히 어둠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눈빛이 있었다는 것을.
■
새벽의 종소리 — 마침내 이루어진 영혼의 부활
■
새벽은 부활의 시간이다. 이 시는 해 질 녘 종소리로 시작해 새벽 종소리로 끝난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너짐에서 다시 세움으로 이동한 것이다.
부활의 꽃은 기적처럼 펑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꽃은 쉼 없이 이어진 고통과 침묵, 자기 성찰의 시간 끝에서 피어난다.
카투사의 부활은 완벽한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 ‘영혼의 회복’이다.
■
결론 — 이 시가 우리에게 남기는 한 줄의 진실
■
〈부활의 기도〉는 한 사람의 죄와 속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언젠가 지나가야 하는 내면의 순례길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은 누구나 부서지며 산다.
하지만 그 부서진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꽃이 있다.
그 꽃의 이름이 바로 부활이다.
정 근 옥 시인은 감정의 소란을 피하고, 절제된 언어로 그 길을 보여준다.
그 덕분에 이 시는 종교를 넘어 인간 전체를 위로하는 시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 종소리는 카투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시를 읽는 모든 이에게 들려온다.
마음을 무너뜨리는 시인의 깊은 시심 속에서
독자의 고민도 함께 타오른다.
■
정근옥 시인의 본 시는
톨스토이의 부활을 모티브로 쓴 기도문의 시이다
■
귀족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과거죄로
타락한 카츄사를 다시 만나 깊은 양심이
깨어난다. 그녀의 속죄 여정을 따라가며
자신도 도덕적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 과정이 양심의 부활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