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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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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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봉도 시
환청처럼 누군가
날 오라고 하네
여긴 이미
가을이 지고 있고
단풍나무도 거의 알몸을
드러낼 것 같다고
이곳에 오면
당신이 꿈꾸던 여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여태껏 만나지 못한
상상 속 여인이
환한 미소로
따뜻하게 반겨주리라고
그녀도 저무는 노을
가을숲처럼
외로운 바람의 소리를
들었노라고
숲을 사랑하는
웬 가을남자가 찾아오면
그를 기쁘게 맞아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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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소리〉 문화평론가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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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바람을 ‘부르는’ 시, 존재를 ‘초대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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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봉도 시인의 〈바람의 소리〉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시가 아니다.
사람을 자연의 품으로 초대하는 시다.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된다.
숲은 공간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기다리는 자리가 된다.
이 시는 외로움, 기다림, 꿈속의 여인, 바람의 목소리, 인간의 내면이 서로 얽힌 감성적 서정시이며, 동시에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자연의 언어로 풀어낸 심리 시(心理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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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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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감정, 상징의 층위를 따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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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왜 ‘환청’으로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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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구절 “환청처럼 누군가 날 오라고 하네”는 이 시의 핵심 감각이다.
바람의 소리는 실제이지만, 그것을 듣는 주체의 마음이 외로울 때 바람은 마치 인간의 부름처럼 들린다.
따라서 이 구절은 ‘환청’이 아니다. 내면의 울림에 가깝다.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 ‘자연의 목소리를 인간의 음성처럼’ 듣는 순간, 시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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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알몸 — 인간의 모습으로 겹쳐지는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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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도 거의 알몸을 드러낼 것 같다고”
이 구절은 가을의 이미지를 넘어, 인간의 상처와 고독을 상징한다.
단풍나무의 ‘알몸’은 가을이 남긴 공허함이며, 동시에 인간이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적나라한 마음의 상태이다.
시인은 계절의 변화를 단순 묘사가 아닌 감정의 은유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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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던 여인’ 실체 없는 희망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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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중반부는 매우 흥미롭다.
“여태껏 만나지 못한 상상 속 여인”의
이 대목은 실제의 한 사람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못한 희망과 위로의 형상화다.
가을숲에 들어서면 마치
그 숲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
그리고 그 기다림을 채워줄 존재가 있는 듯한 느낌.
그 여인은 자연의 의인화이자,
외로운 사람이 스스로에게 붙이는 ‘따뜻한 환영’이 되었다.
즉, 실체적 여인이 아니라
고독한 마음이 만들어 낸 위안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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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바람의 소리를 들었노라고” — 둘의 동질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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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또한 “외로운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라고 한다.
이 말은 여인과 ‘나’는 같은 감정선에 있다는 뜻이다.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외로움이라는 공명(共鳴)으로 이미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두 존재의 만남이 아니다.
외로움의 동일성에 대한 시적 진술이다.
마지막 구절의 가을남자의 정체는
숲을 사랑하는 가을남자이다.
그가 누굴까?
결국 시인 자신이며,
동시에 외로운 우리 모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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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위로의 장소’로 변한다.
바람은 말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인은 만나지 않았지만 마음의 결핍을 채워줄 존재가 되었다.
이 시는 실체적 사건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위로의 환상적 서정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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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이 시가 가진 미학적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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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소리〉의 아름다움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자연의 소리는 인간의 내면으로 읽는 감성적 통로가 된다.
가을 숲이 상실, 외로움, 기다림의
심리 공간이 되었다.
상상 속 여인을 통해 위로가 필요하다는 인간의 마음을 드러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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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다시 ‘가을남자’로 회귀해
자연과 인간, 외로움과 위로, 환영과 실재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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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외로운 사람이 숲에서
바람의 소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을 포착한 시로 하봉도 시인의
가을 서정의 정수에 가까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