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하봉도 시인- 바람의 소리》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바람의 소리〉

하봉도 시


환청처럼 누군가

날 오라고 하네


여긴 이미

가을이 지고 있고

단풍나무도 거의 알몸을

드러낼 것 같다고


이곳에 오면

당신이 꿈꾸던 여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여태껏 만나지 못한

상상 속 여인이

환한 미소로

따뜻하게 반겨주리라고


그녀도 저무는 노을

가을숲처럼

외로운 바람의 소리를

들었노라고


숲을 사랑하는

웬 가을남자가 찾아오면

그를 기쁘게 맞아주라고


************


〈바람의 소리〉 문화평론가 박성진





<서론 — 바람을 ‘부르는’ 시, 존재를 ‘초대하는’ 시>


하봉도 시인의 〈바람의 소리〉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시가 아니다.

사람을 자연의 품으로 초대하는 시다.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된다.

숲은 공간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기다리는 자리가 된다.

이 시는 외로움, 기다림, 꿈속의 여인, 바람의 목소리, 인간의 내면이 서로 얽힌 감성적 서정시이며, 동시에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자연의 언어로 풀어낸 심리 시(心理詩)이다.


<본론>

이미지, 감정, 상징의 층위를 따라가며


바람은 왜 ‘환청’으로 들리는가


첫 구절 “환청처럼 누군가 날 오라고 하네”는 이 시의 핵심 감각이다.

바람의 소리는 실제이지만, 그것을 듣는 주체의 마음이 외로울 때 바람은 마치 인간의 부름처럼 들린다.

따라서 이 구절은 ‘환청’이 아니다. 내면의 울림에 가깝다.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 ‘자연의 목소리를 인간의 음성처럼’ 듣는 순간, 시가 시작된다.



가을의 알몸 — 인간의 모습으로 겹쳐지는 자연


“단풍나무도 거의 알몸을 드러낼 것 같다고”

이 구절은 가을의 이미지를 넘어, 인간의 상처와 고독을 상징한다.

단풍나무의 ‘알몸’은 가을이 남긴 공허함이며, 동시에 인간이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적나라한 마음의 상태이다.

시인은 계절의 변화를 단순 묘사가 아닌 감정의 은유로 사용한다.


‘꿈꾸던 여인’ 실체 없는 희망의 얼굴


이 시의 중반부는 매우 흥미롭다.

“여태껏 만나지 못한 상상 속 여인”의

이 대목은 실제의 한 사람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못한 희망과 위로의 형상화다.

가을숲에 들어서면 마치

그 숲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

그리고 그 기다림을 채워줄 존재가 있는 듯한 느낌.

그 여인은 자연의 의인화이자,

외로운 사람이 스스로에게 붙이는 ‘따뜻한 환영’이 되었다.

즉, 실체적 여인이 아니라

고독한 마음이 만들어 낸 위안의 이미지다.


“외로운 바람의 소리를 들었노라고” — 둘의 동질성을 말한다.


여인 또한 “외로운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라고 한다.

이 말은 여인과 ‘나’는 같은 감정선에 있다는 뜻이다.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외로움이라는 공명(共鳴)으로 이미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두 존재의 만남이 아니다.

외로움의 동일성에 대한 시적 진술이다.

마지막 구절의 가을남자의 정체는

숲을 사랑하는 가을남자이다.

그가 누굴까?

결국 시인 자신이며,

동시에 외로운 우리 모두가 되는 것이다.


숲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위로의 장소’로 변한다.

바람은 말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인은 만나지 않았지만 마음의 결핍을 채워줄 존재가 되었다.

이 시는 실체적 사건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위로의 환상적 서정을 그린 것이다.


결론 — 이 시가 가진 미학적 힘


〈바람의 소리〉의 아름다움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자연의 소리는 인간의 내면으로 읽는 감성적 통로가 된다.

가을 숲이 상실, 외로움, 기다림의

심리 공간이 되었다.

상상 속 여인을 통해 위로가 필요하다는 인간의 마음을 드러냄


마지막에 다시 ‘가을남자’로 회귀해

자연과 인간, 외로움과 위로, 환영과 실재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


이 시는 외로운 사람이 숲에서

바람의 소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을 포착한 시로 하봉도 시인의

가을 서정의 정수에 가까운 작품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박성진 《정근옥 박사-부활의 기도-카투사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