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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모상철 시인-낙엽이 가는 길에》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낙엽이 가는 길에〉


竹泉 모상철


마지막 남겨진 흔적들

자유로운 구속이 빙그레

미소를 남긴다


그렇게 고운 빛깔로 유혹을

서슴지 않으시도록

햇살이 위로하는 날

만추의 가을 한 잎이

가슴을 두드린다


인적 드문 한적한 오솔길 옆

벤치에 내려앉은 세월이

등을 투닥거리면

뒤돌아보는 그리움은

하얗게 미소를 짓는

망초대의 속삭임


가을이 전해주는 발짝 소리라 한다


을사년의 어수선함 속에서도

변덕스러운 가을을 보내는 마음

화려한 노을빛에 담긴 만추

능선을 넘어가는 임을 바라본다


바람은 단풍잎을 흔들어댄다


************

〈평론 — 가을의 끝자락을 붙드는 조용한 손〉


문화평론가 박성진


이 시는 가을 풍경을 단순히 묘사한 작품이 아니다.

가을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한 사람의 조용한 내면기행에 더 가깝다.

처음의 “자유로운 구속”이라는 표현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지닌 이중성을 잘 담고 있다. 낙엽은 자유롭게 흩날리지만 어쩔 수 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다.

시인은 이 억눌림과 자유의 공존을 빙그레 미소 짓는 어투로 풀어낸다.


“만추의 가을 한 잎이 가슴을 두드린다”는 대목은 자연이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의 사건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실제로는 아무 소리 없이 떨어지는 잎이지만, 시인에게는 오래 묵은 감정을 건드리는 손길처럼 다가온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살아 있는 장면이다.


특히 아름다운 구절은 “벤치에 내려앉은 세월이 등을 투닥거리면”이다. 세월을 의자에 앉힌다는 상상력, 그리고 그 세월이 시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린다는 표현은 인생을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결이다. 세월을 두려움이나 후회가 아니라 ‘위로의 존재’로 보는 성숙한 시선이 돋보인다.


망초대를 바라보며 하얗게 미소 짓는 그리움을 떠올리는 장면 역시 잔잔하지만 매우 깊다. 소박한 들꽃 하나가 기억을 깨우고, 지나간 시간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듯한 분위기가 감각적으로 살아난다.

자연의 사소한 움직임을 감정의 미세한 떨림과 연결하는 방식이 이 시의 가장 부드러운 매력이다.


시 후반에 나타나는 “을사년의 어수선함”은 개인적 기억이든, 시대적 흔적이든 단순한 가을시를 넘어 서사가 생겨나는 지점이다.

혼란의 시기를 지나온 경험이 가을의 풍광 속에서 다시 떠오르며, 계절의 변화가 삶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시는 사계절 중 가을이 가진 ‘회상의 힘’을 정확히 짚어낸다.


마지막 구절의 “바람은 단풍잎을 흔들어댄다”는 문장은 무거운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삶은 결국 흔들림 속에서 지나가며, 그 흔들림이 계절과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법이라는 사실을 기척 없이 전한다. 가을을 보내며 느끼는 아쉬움, 그리움, 체념, 아름다움이 한 문장 안에 스며 있다.


이 시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빌려

한 생의 온도와 기억을 고요하게 꺼내놓는 작품이다.

잔잔하지만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마음의 물결 같은 가을의 서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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