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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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옥 시인
고요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전방
최전선
초소 앞
경계병의
날카로운
총구가
나를 향해
시퍼렇게
반짝거린다
출렁거리던
번뇌의 물결
푸른 달빛에
잔잔한
강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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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문화평론가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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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정체를 묻는 시인의 첫 시선>
정근옥 시인의 〈묵상〉은 첫 행부터 독자를 ‘무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여기서 말하는 고요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의식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집중이다.
“고요 이외는 / 아무것도 없는 전방”이라는 표현은
육체가 전방에 있지만, 의식은 이미 세상의 모든 외부 소리를 지워버린 상태임을 보여준다.
전방의 긴장 속에서 오히려 고요가 전부가 되는 역설,
여기서 시인은 ‘고요의 본질’을 묻는다.
고요는 무섭다.
고요는 맑다.
고요는 때로 죽음의 무게까지 걸머진다.
이 고요 속에서 시인은 자신을 통째로 바라본다.
이 시의 출발점은 그래서 단순 묘사가 아니라, 존재론적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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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이라는 장소의 잔혹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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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은 한국 현대사의 피와 눈물이 반복된 장소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깨어 있는 곳, 잠들지 못한 기억들이 새벽마다 쌓이는 곳.
그곳은 인간 존재가 가진 최후의 본능이 발동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정근옥 시인은 ‘전방’을 단순한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인간이 도망칠 수 없는 궁극의 현실로서 제시한다.
전방은 늘 ‘경계’ 위에 있다.
삶과 죽음, 침묵과 폭력, 고요와 공포의 끼어듦이 그곳의 본질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전방은 ‘삶의 맨 끝’,
즉 인간 존재의 진실이 흘러나오는 극한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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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절들의 단절이 빚어내는 생생한 현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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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옥 시인은 이 시에서 문장을 길게 풀지 않는다.
짧은 행, 끊어진 어절, 명사 중심의 구조,
이것은 단순한 서정시의 리듬이 아니라,
초소에서의 숨 막히는 공기를 언어로 재현한 기법이다.
전방의 공기는 늘 끊긴다.
숨은 조심스럽고, 말을 쥐어삼키듯 한다.
그 긴장감을 시인은 행의 단절로 구현한다.
“전방 / 최전선 / 초소 앞”
이 세 단어만으로 전방의 지리, 심리 구조가 단칼에 그려진다.
시인은 말을 줄이되 의미를 더욱 묵직하게 한다.
이 절제는 시조적 고풍이 아니라, 현대시의 칼날 같은 호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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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구의 ‘반짝임’과 죽음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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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구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생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눈’과 같은 존재다.
“시퍼렇게 / 반짝거린다”
이 구절은 거의 사운드가 들릴 정도의 이미지성을 가진다.
시퍼런 금속의 냉기가,
차가운 바람이 확 끼치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총구의 반짝임은 ‘살아 있음의 위기’를 상징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위협을 공포가 아닌 자기 성찰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총구가 나를 겨누는 순간,
오히려 마음은 더욱 선명해지고 깊어진다.
죽음을 보며 삶이 또렷해지는 아이러니,
이것이 이 시가 가진 가장 큰 미학적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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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뇌의 파동을 물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이유>
“출렁거리던 / 번뇌의 물결”
여기서 번뇌는 불교적 어휘이지만, 단순한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일상적 고통 전체를 상징한다.
시인의 마음속에서 번뇌는 고체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르듯, 파도가 치듯, 늘 흔들리고 끓는다.
왜 물일까?
물은 변화의 본질이다.
물은 스스로 형태를 만들지 않는다.
흔들리고, 요동치고, 출렁이는 대로 흘러간다.
시인은 번뇌를 물로 그리며 인간 마음의 불안정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이미지는 지극히 시적이면서도 철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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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달빛, 번뇌를 가라앉히는 초월적 빛>
“푸른 달빛”은 이 시의 결정적인 변모 지점이다.
달빛은 따뜻하지 않다.
달빛은 뜨겁지도 않다.
달빛은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사색의 빛이다.
푸른 달빛이 번뇌의 물결에 닿자,
그 출렁임은 서서히 ‘잔잔한 강물’이 된다.
이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명상의 시작이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고요한 빛을 발견한다.
달빛이란 바깥의 빛이지만, 그 빛은 내면 깊은 곳에 스며든다.
푸르다는 색은 치유의 색이다.
푸른 달빛은 시인의 마음에서
요동치던 감정을 가라앉히는 ‘정화의 힘’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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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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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내면적 전환은 매우 급진적이다.
총구가 겨누어진 최전선에서
번뇌가 가라앉아 ‘강물’로 변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다.
강물은 방향을 안다.
강물은 정해진 길을 방황하지 않는다.
내면이 강물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선언문이다.
전방이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시인은 ‘흐름’을 되찾는다.
이는 인간 정신의 놀라운 회복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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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평온의 대비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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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는 이유는
외부와 내부가 극도로 대조되기 때문이다.
밖은 위협이다.
반대로 안은 고요다.
밖은 총구다.
안은 강물이다.
밖은 삶과 죽음이 맞붙는 장소다.
안은 번뇌를 가라앉히는 명상의 자리다.
이 극단적 대비는 독자의 감정에 강한 충격을 남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외부가 불안하면 내부도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반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외부는 변하지 않지만
내부는 변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묵상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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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 종교적 감수성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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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묵상’이라는 제목 때문에 기독교적 색채가 묻어나지만,
시 속의 이미지들은 불교, 동양적 사유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번뇌, 물결, 달빛, 강물, 이 상징들은 불교적 명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방의 고요’는 기독교적 회개의 시간과도 비슷하다.
결국 이 시는 특정 종교를 넘어서는
인간 보편의 내면 치유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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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미학,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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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게 한다.
전방의 공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관자의 움직임도 설명하지 않는다.
총구의 위협을 과장하지 않는다.
시인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이 절제의 미학은 정근옥 시인의 중심적 특징으로,
독자가 스스로 의미를 채워 넣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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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남기는 마지막 울림, 고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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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남는 이미지는
‘잔잔한 강물’이다.
이 강물은 단지 평온의 이미지가 아니다.
강물은 생명의 상징이며, 방향의 상징이고, 돌아가는 길의 상징이다.
정근옥 시인의 〈묵상〉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전방에서
자기 존재를 다시 가다듬는 관조의 시다.
바깥의 세계는 여전히 시퍼렇고,
총구는 그대로이며,
전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변한다.
그 변화가 바로 ‘묵상’이다.
이 시는
폭력보다 고요가 더 강하고,
총구보다 내면이 더 깊으며,
번뇌보다 성찰이 더 오래간다는 사실을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전한다.
묵상 1의 작품에 이어 시인의 작품, "새들의 집"신간에 시인의 남다른 문학세계가 펼쳐져 있어 그 속에 담긴 꿈과 생명을 키워나가는 새집에 둥지를 틀며 행복할 독자들이 이어질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