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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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시간〉 평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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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진 시인
물이 손등을
뒤집어 흰 바닥 위에 드러난 푸른
손금을 내민다.
물이 천 개의
몸통을 흔들어 허리
굵은 파도로
부서진 햇살을 담아낸다.
내 손바닥을 물의 손등에 대고 찰싹찰싹
엎질러진 시간을 매질한다
숨이 찰 때까지
벌 받듯 지켜온 시간은 비로소 손금을 따라 여울로 흐르고
옆 길 물은 제 입을 벌려 꿀렁꿀렁
자맥질하는
눈물을
받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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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박성진
물의 시간 에세이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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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 — 물이 손을 내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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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시작되는 순간, 물이 갑자기 사람처럼 다가온다.
말없이 손등을 뒤집어 보이며 “이걸 좀 봐”라고 하는 것 같다.
물 위에 드러난 손금은 마치 오래전부터 감춰두었던 이야기 같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시의 세계는 이미 열려 있다.
물은 흘러가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말을 거는 존재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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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장,
손금은 곧 시간의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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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금이라는 말은 참 따뜻하다.
한 사람의 생을 굽이굽이 새겨둔 작은 지도,
그 지도 같은 문양을 물이 스스로 펼쳐 보인다.
그 손금은 인간보다 훨씬 오래된 시간의 길일 것이다.
비가 오고 눈이 쌓이고, 태풍이 지나가며
물은 그 순간들을 고스란히 품어왔다.
흘러가지만 잊지 않는 것이 물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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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장,
천 개의 몸과 굵은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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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몸통”이라는 표현은 물이 얼마나 다정한 존재인지 떠올리게 한다.
하나의 모습에 머물지 않고, 빛과 바람을 따라
계속 새 얼굴을 만들어낸다.
굵은 파도가 햇살을 껴안는 장면은 특히 아름답다.
햇살이 물결 위에서 부서질 때,
물은 그 빛을 잠시 품어주고 다시 세상으로 내보낸다.
흔들리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호흡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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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장, 손바닥을 대는 순간 생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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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물 위에 자기 손바닥을 올린다.
아무렇지 않은 동작 같지만,
그 속에는 오래도록 참고 견뎌온 시간들이 묻어 있다.
찰싹찰싹----
이 소리 속에는 후회도 있고, 지나간 세월을 어루만지는 마음도 있다.
‘엎질러진 시간을 매질한다’는 표현은
돌아오지 않는 순간들을 향한 작고 조용한 울림이다.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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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장, 여울이 들려주는 조용한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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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온 시간들이 여울로 흘러 들어가는 장면은
이 시에서 가장 편안한 순간이다.
여울은 물이 쉬어가는 자리이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소리가 있다.
부딪쳐왔던 모든 흔들림이
그곳에서는 낮은 울음처럼 들린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버티고 견디던 시간들이
어느 순간 조용히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 자리가 여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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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장, 곁불이라는 은근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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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류의 큰 물이 아니다.
곁에서 조용히 흐르던 작은 물줄기가
눈물을 받아준다.
이 장면이 특히 따뜻하다.
중심에서 벗어난 존재가
오히려 가장 중요한 일을 맡는 순간.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떠오른다.
작지만 깊은 위로는 늘 이런 사이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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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장, 자맥질하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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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흔들리며 자맥질하는 눈물은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 같다.
겉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집히는 울음이 더 아프다.
시인은 그 아픔을 억지로 숨기지 않는다.
물에게 맡기고, 물은 그 울음을 품어준다.
이 동작 하나만으로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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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사람, 서로 닮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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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다 보면
물과 사람의 시간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둘 다 흘러가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고,
둘 다 흔들리지만 어느 순간 다시 고요를 찾는다.
물의 손금과 인간의 기억이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물은 사람을 닮고, 사람도 물을 닮는다.
흐르는 것들은 모두 비슷한 상처와 숨결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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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시간이 가르쳐주는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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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끝에서 우리에게 남기는 말은 단순하다.
흐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
흐르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는 것.
물은 빛을 품고, 상처를 받아내고,
눈물을 대신 흔들어주고,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물의 시간’을 읽는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다.
흐르고 흔들린 만큼,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이 시는 조용히 말해주었다.
물의 시간의 시는 매력을 품고 있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