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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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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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지석진 시인
흐린 하늘에서
풀린 실타래
날실 비로
내리고
바람결 씨실과 인연을
맺는다
한 올 한 올
풍경을
직조하는
은밀한
정성으로
성글었던 봄이
촘촘히
젖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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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문화평론가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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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타래처럼 풀리는 하늘, 직조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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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진 시인의 이 시는 자연 묘사를 넘어서 하늘과 땅이 하나의 직조 작업장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봄비를 “풀린 실타래”라 부르는 첫 구절에서 이미 시의 세계는 감각의 영역을 벗어나 사유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비는 떨어지는 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풀어내는 실이며, 이 실을 내려놓기 위해 하늘은 자신을 열어젖힌다.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능동적 창조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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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실 비’라는 관념의 예술적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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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실 비”라는 표현은 한국적 전통 이미지와 시인의 독창적 시각이 결합한 문장이다. 날실은 직물을 이루는 기둥 같은 실이다.
이 말은 곧 봄비가 봄이라는 계절의 구조를 잡아주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뜻이다. 봄이 오는 이유가 아니라, 봄이 짜이는 방식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자연을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만드는 원리로 바라보는 사유가 놀라울 만큼 절제된 언어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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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씨실’과 맺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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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바람결 씨실과 인연을 맺는다”는 구절은 자연의 모든 요소가 서로 얽히며 세상을 만든다는 관계적 세계관을 품는다. 바람은 씨실이 되고, 비는 날실이 된다. 둘이 만나야 직물이 완성되듯, 자연의 힘도 서로의 결을 만나야 비로소 계절이 완성된다. 이 만남을 인연이라 불러 인간의 삶과 자연의 흐름을 잇는 다리를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자연은 인간의 삶처럼 관계를 짜며 살아 있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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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올 한 올’의 정성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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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풍경을 직조하는 과정을 “한 올 한 올”이라 표현하며 자연의 섬세함을 인간의 공예적 감각으로 끌어온다.
이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자연을 하나의 장인으로 읽는 시인의 태도이다.
자연은 거칠게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결을 따라 천천히, 정확하게, 정교하게 풍경을 짜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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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한 정성’의 조용한 시간성>
봄비는 소리 없이 내리지만, 그 속에는 기묘할 만큼 신중하고 깊은 정성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은밀한 정성”이라 부른다. 비는 웅장하지 않다.
그러나 이 은밀함이야말로 자연의 진짜 힘이다.
드러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봄을 만드는 손길은 언제나 조용히 움직인다.
자연이 시간의 흐름을 만드는 방식은 대체로 말 대신 묵묵한 정성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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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글음에서 촘촘함으로, 봄의 결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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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들은 봄의 질감 변화를 보여준다. “성글었던 봄이 / 촘촘히 / 젖어 간다.”
이 구절은 단순한 상태 변화가 아니라 밀도의 회복이다.
아직 봄이 다 오지 않은 성근 계절이, 비를 맞으며 결을 채우고, 결이 채워지며 기운을 얻고, 기운을 얻으며 비로소 제철의 얼굴을 완성한다.
비는 봄의 허전한 틈을 메우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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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젖음은 곧 계절의 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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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는다는 말은 단순히 물에 적시는 것이 아니다. 계절이 내면으로 스며드는 과정이다.
봄이 촘촘히 젖어 간다는 말은, 봄의 결이 살아난다는 뜻이며, 봄이라는 시간의 체온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비가 내린 만큼 계절의 심장도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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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조의 은유가 보여주는 생태적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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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을 관통하는 직조 은유는 단순한 미적 장치가 아니다. 이는 자연 전체가 서로를 짜 맞추며 움직이고, 서로의 결을 따라 살아가는 생태적 세계관을 담아낸다.
비와 바람, 풍경과 시간, 공기와 계절이 모두 한 직물의 실처럼 서로 얽힌다.
이 세계에서는 어느 하나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서로를 살리는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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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제된 언어와 비의 미세한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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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진 시인의 언어는 언제나 절제되어 있다. 불필요한 수식을 덜어낸 자리에 남는 것은 촉감과 사유의 결합이다. 이 시에서 비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관계를 짓고 계절을 짜고 세계를 엮는 존재론적 실이다. 시인의 언어는 조용하지만 깊고, 담백하지만 단단하다. 지석진 시인의 시는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세계는 놀라울 만큼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