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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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주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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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경 시인 문학박사
당신의
무릎에서
나의 입술이
떨고 있어요
사랑의 결실이
입덧하며
장미를 낳았어요
녹슬고 헐거워진 일상이
말갈기 휘날리며
달리네요
포용이란 의미를
생각하다가
우린
포옹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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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말보다 먼저 흔들리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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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첫 장면은 조용합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가장 큰일이 일어납니다.
말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는데, 둘 사이엔 이미 연결이 생깁니다.
입술이 떨린다는 말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자리로 스며드는 첫 신호입니다.
사랑은 종종 이렇게, 말이 움직이기 전의 침묵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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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라는 낮아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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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은 높지 않은 자리입니다.
어깨나 가슴이 아닌, 조금 더 낮고 부드럽고 맥이 느리게 뛰는 곳.
그 자리에 ‘나’의 입술을 떨며 기대 있다는 사실은
둘이 이미 같은 고도를 향해 내려왔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질 때 가장 먼저 낮아지는 것이
고개도, 목소리도 아닌 자기 마음의 높이라는 것을 시는 조용히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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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결실이 입덧한다는 말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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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덧이란 몸이 새 생명을 알아볼 때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그 반응을 사랑의 무늬로 가져온 시인의 언어는 참 섬세합니다.
사랑이 완성품처럼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자라며 흔들리고,
조금씩 세상을 바꾸려는 몸짓을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장미를 낳는다는 말 역시,
사랑이 세상에 내놓는 빛나는 순간을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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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탄생은 고요한 폭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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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 피는 일은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 안에는 작은 파열과 뜨거움이 있습니다.
입덧이라는 단어가 앞에 놓였다는 건
이 장미가 단순한 꽃이 아니라
사랑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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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일상이 다시 달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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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쉽게 닳아버립니다.
관계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음이 서로에게 닿는 순간,
멈춰 있던 삶이 갑자기 속도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말갈기 휘날리며 달린다”는 표현은
오래 쉬어 굳어버린 삶이 다시 뛰어오르는 장면을
눈앞에 펼쳐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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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기의 이미지가 전하는 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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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기는 고요한 사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속도, 생기, 방향을 품은 생명체의 몸짓입니다.
그러니 시 속 일상이 말갈기를 얻었다는 말은
삶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자
죽어 있던 시간의 근육이 깨어나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감정에 물이 들 때보다,
그 감정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더 깊다는 걸 시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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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서 행동으로, 행동에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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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을 생각한다는 말은
머릿속에서 개념을 굴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포옹으로 옮겨갑니다.
사랑은 종종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몸이 먼저 결론을 내립니다.
이 시의 마지막 행은
그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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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은 가장 단순한 방식의 합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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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은 화려한 행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 가장 솔직합니다.
말 대신 몸을 내어주는 일,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일.
포옹은 두 사람이 더 설명할 것을 남기지 않는 순간입니다.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괜찮다는 신호.
그 신호 하나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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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감정 단어 없이도 따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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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시 전체를 봐도 ‘사랑한다’라는 직접적인 말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 단어가 없기 때문에
사람의 실제 체온 같은 것이 더 강하게 들어옵니다.
사랑은 말로 확인받기보다
이런 작은 떨림과 움직임에서 더 자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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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건너가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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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는 철학이 있습니다.
개념을 늘어놓는 철학이 아니라,
몸으로 말해지는 철학입니다.
떨림, 입덧, 장미, 달림, 포옹.
모두 몸의 움직임입니다.
사랑이란 결국 몸이 먼저 알아보고
몸이 먼저 움직이며
몸이 먼저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시인은 어느 설명도 없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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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줄이 남기는 잔잔한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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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포옹했지요.”
시의 끝은 많은 말을 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말을 덜어냅니다.
덜어냄 속에서 남는 것이 있습니다.
품는 일, 안기는 일,
두 사람이 서로의 시간에 살짝 기대는 일.
시인은 그 장면을 과장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놓아둡니다.
독자는 그 담담함 속에서
더 오래 남는 따뜻함을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