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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최승대 시인-단감의 노래》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단감의 노래〉


최승대 시인


늦가을 문턱에서 노란빛으로

물든 네가 통통한 웃음을 안고

찾아왔다

네 덕분에 가을은 달콤하고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다


너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떻게 이 길을 걸어 내 곁에

닿았을까

북면의 들녘마다

너와 닮은 아이들이

햇살을 품고 매달았구나


이제 작은 가방을 메고

전국 곳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가정의 기쁨이 되겠지

남도 할아버지의 밥상에도

고향 떠난 누이의 손길에도

너는 고운 비타민이 된다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너의 달콤한 숨결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


〈단감의 노래〉


문화평론가 박성진





<첫 장>


<‘늦가을 문턱’이라는 시적 배경의 힘>


이 시는 첫 구절부터 계절의 문턱을 잡아채며 시작한다. ‘늦가을 문턱’이라는 표현은 시간의 경계를 말하지만, 동시에 감각의 문을 연다.

이 문턱은 단순한 계절의 경계가 아니라 풍요로움과 수확, 기다림과 회상의 정서가 응축된 지점이다.

단감이 등장하는 순간, 계절은 인간의 감각 안으로 무르게 스며든다.


‘노란빛으로 물든 네가’라는 구절은 단감의 색채를 넘어서 늦가을 햇살의 온도를 마음속에 비친다. 시인은 과일의 물성을 넘어 빛으로 단감을 설명함으로써, 한 과일이 아니라 ‘가을 전체의 분신’을 불러낸다.




<둘째 장, ‘통통한 웃음’의 은유>


단감이 ‘웃음을 안고 찾아왔다’는 표현은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다. 단감의 모양과 질감을 감각적으로 붙잡아 오면서, 동시에 인간적 기쁨을 이식한 절묘한 은유이다.

과일 하나에도 미소의 온도를 부여하는 이 대목에서 시인의 정서는 따뜻하고 소박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웃음의 방향성이다.

단감이 웃는 것이 아니라, 단감이 사람에게 웃음을 가져다준다.

즉, 시는 이미 단감이라는 대상을 통해 인간 내부의 감정 지형을 조용히 환하게 빛내기 시작한다.




<셋째 장, ‘너는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질문의 시학>


시의 두 번째 연은 질문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너는 어디에서 왔을까 / 어떻게 이 길을 걸어 내 곁에 닿았을까”


질문은 단감의 기원을 묻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과 ‘노동’, ‘시간’에 대한 사유로 확장된다.

단감이 이곳에 오기까지 개입한 농부의 손길, 비와 바람의 과정, 익어가는 시간의 축적이 모두 묵묵히 배후에 드러난다.


북면 들녘마다 매달린 아이들 같은 단감은 자연과 인간의 공동작업물이다.

여기서 시인은 ‘아이들’이라는 비유를 통해 풍경에 생명성을 불어넣는다.

단감은 그냥 열매가 아니라 자연이 길러낸 ‘가을의 자식들’이 된다.




<넷째 장, 지역성(북면)을 불러낸다는 의미>


‘북면’이라는 지명은 시의 지반을 현실로 내려앉힌다.

단감이 특정 장소의 공기, 토양, 햇살을 품고 자란 존재임을 환기한다.

한 과일이 ‘지역성’을 갖는 순간, 시는 농경문화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안아 올린다.

이것은 한국 현대시에서 자주 보이는 방식이지만, 최승대 시인은 이를 매우 순하고 담백하게 형상화한다.

그 지점에서 시적 말투는 오히려 더 깊은 신뢰를 준다.




<다섯째 장, 이동하는 단감, ‘여행’이라는 생활 미학>


세 번째 연에서 단감은 정지된 풍경을 떠나 움직이는 존재로 바뀐다.


“작은 가방을 메고 / 전국 곳곳을 여행하며”


이 구절의 아름다움은 발랄한 상상력에 있다.

단감은 가방을 메고 여행하는 작은 존재가 되고, 그 이동은 한국의 식탁이라는 문화적 지형을 반짝이며 순례한다.


남도 할아버지의 밥상, 고향 떠난 누이의 손길,

이 두 장면만으로도 단감이 지닌 정서적 스펙트럼이 드러난다.

단감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돌봄, 그리움, ‘가족의 온도’를 전해주는 상징물이 된다.




<여섯째 장, 비타민이라는 속성의 온기>


‘너는 고운 비타민이 된다’는 표현은 매우 간결하지만 넓은 울림을 갖는다.

비타민은 생체를 돕는 보조물질이지만, 인간의 마음에서도 비타민은 감정의 작은 빛을 의미한다.

단감은 우리의 하루를 밝히는 작은 생명의 조각 같은 것이다.

시인은 과학적 명칭을 인용하면서도, 그것을 절묘하게 정서의 언어로 전환한다.




<일곱째 장, 마지막 연의 절제된 서정성>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너의 달콤한 숨결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마지막 연은 가을의 종결점에서 시적 자아가 얻는 감정의 깊이를 강조한다.

단감의 ‘숨결’이라는 표현은 신선함, 생기, 자연의 향기까지 포함해 한 존재의 생명 호흡을 느끼게 한다.

이 숨결이 마음을 물들인다는 말은 맛을 넘어서 기억을 바꾸고, 풍경을 달리 보이게 하는 정서적 변화로 확장된다.




< 전체 구조의 특징, 순환과 확장>


이 시의 구조는


가을의 배경


단감의 도착


단감의 기원


단감의 이동


단감이 남긴 감정적 울림

이렇게 점점 확장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단감 하나가 --가을 풍경

--지역의 들녘

--전국의 식탁

--한 개인의 마음

을 거쳐 가며 세계를 확장시키는 구조다.

이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세계를 여는 시학’의 전형적인 방식이며, 매우 안정된 시적 구성이다.




< 이 시의 미학적 의의>


〈단감의 노래〉는 거대 담론이나 서사 대신, 일상의 작은 과일 하나를 통해

어떻게 세계의 온기를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고, 담백한 언어 속에

노동, 시간, 가족, 기억, 고향, 계절 같은 인간의 정서적 상징들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최승대 시인의 최대 강점은 ‘정직한 시어’다.

과한 수사 없이, 그러나 충분히 따뜻한 문장들로

단감 하나의 여정을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세심히 포착해 내었다.


이 시는 ‘작은 것의 서정’을 가장 한국적인 감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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