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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김석인-바람의 주인》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바람의 주인〉


夕江 김석인


우리는 들판을 일구는 사람

그들은 손에 쥔 하나의 쟁기일 뿐

쟁기를 사랑하지 말라


쇳결이 반짝인다고

하늘의 별로 착각하지 말라

바람 같은 말을 믿지 말라


바람은 어디로든 흩어지나

씨앗은 흙 속에서만 자란다

열매로 판단하라


우리가 세운 도구가

땅을 제대로 가르지 못하면

흙을 털어내고 다시 달아라


그래도 길을 내지 못하면

미련 두지 말고

새 쟁기를 들면 된다


주인은 언제나 들판의 사람

도구는 언제나

그 손끝에 달린 것일 뿐이다


***********


〈바람의 주인〉


문화평론가 박성진



주체의 자리를 되찾는 첫 문장


시의 첫머리는 마치 오래된 흙냄새처럼 묵직하다.

“우리는 들판을 일구는 사람.”

이 선언은 인간의 존엄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다.

들판을 일구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첫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조용하게, 그러나 흔들릴 수 없게 말한다.

이 한 줄로 이미 시의 척추가 세워진 셈이다.


도구와 사람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시인의 태도


“그들은 손에 쥔 쟁기일 뿐”이라는 문장은

현대가 잃어버린 우선순위를 되찾아준다.

도구가 사람을 지배하고,

제도가 인간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시대에

이 시는 질서를 뒤집어 되돌린다.

쟁기는 쟁기일 뿐이다.

아무리 번쩍거려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보다 앞설 수 없고,

사람에게 주인 행세할 이유도 없다.


반짝임의 유혹을 꿰뚫는 날카로운 한 줄


“쇳결이 반짝인다고

하늘의 별로 착각하지 말라.”

화려한 껍데기에 끌려가는 시대를

단 두 줄로 꿰뚫어 본다.

반짝임은 빛이 아니다.

광택은 별빛이 아니다.

겉만 번드르르한 대상에 환호하는 이 시대의 허세를. 시인은 너무도 쉽게 걷어낸다.

사람을, 도구를, 권력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 일의 위험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언어의 바람을 경계하는 지혜


“바람 같은 말을 믿지 말라.”

이 문장은 권력의 말, 홍보의 말, 유혹의 말을 모두 꿰뚫는다.

바람은 사라지는 존재이다.

방향이 끊임없이 변하고,

무게가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늘은 미소로,

내일은 다른 얼굴로 불어오는 말들.

그 말에 휘둘리지 말라는 경고이자,

언어의 속도보다 진실의 무게를 보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씨앗과 흙의 은유 — 생명의 원리와 인간의 자리


“씨앗은 흙 속에서만 자란다.”

이 문장은 이 시 전체의 영혼 같은 대목이다.

성장은 늘 어둡고 고요한 곳에서 일어난다.

눈부신 자리, 떠들썩한 자리는

씨를 키우지 못한다.

땅 밑의 어둠, 습기, 기다림,

이 모든 불편함 속에서 비로소 생명이 움직인다.

시인은 성장의 원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삶에도 그대로 겹쳐진다.



열매로 판단하는 삶의 기준


“열매로 판단하라.”

이 짧은 구절은 오래된 지혜의 중심에 있다.

말이 아니라 결실,

계획이 아니라 실천,

약속이 아니라 성과.

이 기준은 시대를 넘어 변하지 않는다.

사람도, 조직도, 도구도

열매로서만 평가받는다.

말은 바람이 되지만

열매는 땅에 남는다.



도구를 점검하는 인간의 책임


“땅을 제대로 가르지 못하면

흙을 털어내고 다시 달아라.”

도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사람이 점검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 시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도구가 비뚤어졌다면,

잘못된 것은 그것을 쥔 인간의 태도이다.

다시 매만지고, 다시 손질하는 과정이

삶의 품격을 만든다.



미련을 버리고 새 길을 택하는 용기


“그래도 길을 내지 못하면

새 쟁기를 들면 된다.”

이 구절은 놀라울 만큼 담대하다.

세상이 망가지는 이유는

낡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 때문이다.

효용을 잃은 도구를 붙잡고

정작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채

그 무게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이 많다.

시인은 말한다.

길을 열어주지 못하는 도구라면

과감히 손에서 놓아도 좋다고.

이 단호함은 곧 삶의 해방 선언이다.


주인의 자리를 되찾는 마무리


“주인은 언제나 들판의 사람.”

마지막 구절은 시 전체의 골격을 다시 한번 세운다.

도구가 아무리 세련되고,

아무리 화려한 이름을 달고 있어도

주인은 사람이다.

가장 낮고 묵묵한 자리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솟아난다.



실천을 요구하는 문학의 힘


이 시는 단순한 감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독자에게 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바람 같은 말 대신

열매를 보라는 태도,

도구를 점검하고,

효용을 잃으면 바꿀 줄 아는 결단.

문학이 이렇게 구체적인 실천 윤리를 품을 때

시 한 편은 한 권의 철학서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마지막 장


동양적 사유의 깊은 결을 품은 작품


김석인 시인의 시는 흙과 바람, 도구와 사람의 자리를 정확히 놓아준다.

그 방식은 동양 사유의 근본과도 닿아 있다.

이름을 바로 세우는 정명,

허상을 벗겨내는 무상,

필요한 것을 남기고 불필요함을 버리는 무위.

그 모든 흐름이 고요하게 스며들어있다.

결국 이 시가 말하는 바는 한 가지다.

사람이 중심을 잃지 않으면

어떤 바람도 그를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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