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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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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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江 김석인
우리는 들판을 일구는 사람
그들은 손에 쥔 하나의 쟁기일 뿐
쟁기를 사랑하지 말라
쇳결이 반짝인다고
하늘의 별로 착각하지 말라
바람 같은 말을 믿지 말라
바람은 어디로든 흩어지나
씨앗은 흙 속에서만 자란다
열매로 판단하라
우리가 세운 도구가
땅을 제대로 가르지 못하면
흙을 털어내고 다시 달아라
그래도 길을 내지 못하면
미련 두지 말고
새 쟁기를 들면 된다
주인은 언제나 들판의 사람
도구는 언제나
그 손끝에 달린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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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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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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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자리를 되찾는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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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첫머리는 마치 오래된 흙냄새처럼 묵직하다.
“우리는 들판을 일구는 사람.”
이 선언은 인간의 존엄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다.
들판을 일구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첫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조용하게, 그러나 흔들릴 수 없게 말한다.
이 한 줄로 이미 시의 척추가 세워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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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와 사람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시인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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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손에 쥔 쟁기일 뿐”이라는 문장은
현대가 잃어버린 우선순위를 되찾아준다.
도구가 사람을 지배하고,
제도가 인간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시대에
이 시는 질서를 뒤집어 되돌린다.
쟁기는 쟁기일 뿐이다.
아무리 번쩍거려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보다 앞설 수 없고,
사람에게 주인 행세할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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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임의 유혹을 꿰뚫는 날카로운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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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결이 반짝인다고
하늘의 별로 착각하지 말라.”
화려한 껍데기에 끌려가는 시대를
단 두 줄로 꿰뚫어 본다.
반짝임은 빛이 아니다.
광택은 별빛이 아니다.
겉만 번드르르한 대상에 환호하는 이 시대의 허세를. 시인은 너무도 쉽게 걷어낸다.
사람을, 도구를, 권력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 일의 위험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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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바람을 경계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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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같은 말을 믿지 말라.”
이 문장은 권력의 말, 홍보의 말, 유혹의 말을 모두 꿰뚫는다.
바람은 사라지는 존재이다.
방향이 끊임없이 변하고,
무게가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늘은 미소로,
내일은 다른 얼굴로 불어오는 말들.
그 말에 휘둘리지 말라는 경고이자,
언어의 속도보다 진실의 무게를 보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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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과 흙의 은유 — 생명의 원리와 인간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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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흙 속에서만 자란다.”
이 문장은 이 시 전체의 영혼 같은 대목이다.
성장은 늘 어둡고 고요한 곳에서 일어난다.
눈부신 자리, 떠들썩한 자리는
씨를 키우지 못한다.
땅 밑의 어둠, 습기, 기다림,
이 모든 불편함 속에서 비로소 생명이 움직인다.
시인은 성장의 원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삶에도 그대로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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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로 판단하는 삶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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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로 판단하라.”
이 짧은 구절은 오래된 지혜의 중심에 있다.
말이 아니라 결실,
계획이 아니라 실천,
약속이 아니라 성과.
이 기준은 시대를 넘어 변하지 않는다.
사람도, 조직도, 도구도
열매로서만 평가받는다.
말은 바람이 되지만
열매는 땅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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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를 점검하는 인간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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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제대로 가르지 못하면
흙을 털어내고 다시 달아라.”
도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사람이 점검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 시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도구가 비뚤어졌다면,
잘못된 것은 그것을 쥔 인간의 태도이다.
다시 매만지고, 다시 손질하는 과정이
삶의 품격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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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을 버리고 새 길을 택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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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길을 내지 못하면
새 쟁기를 들면 된다.”
이 구절은 놀라울 만큼 담대하다.
세상이 망가지는 이유는
낡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 때문이다.
효용을 잃은 도구를 붙잡고
정작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채
그 무게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이 많다.
시인은 말한다.
길을 열어주지 못하는 도구라면
과감히 손에서 놓아도 좋다고.
이 단호함은 곧 삶의 해방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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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자리를 되찾는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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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언제나 들판의 사람.”
마지막 구절은 시 전체의 골격을 다시 한번 세운다.
도구가 아무리 세련되고,
아무리 화려한 이름을 달고 있어도
주인은 사람이다.
가장 낮고 묵묵한 자리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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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을 요구하는 문학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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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단순한 감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독자에게 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바람 같은 말 대신
열매를 보라는 태도,
도구를 점검하고,
효용을 잃으면 바꿀 줄 아는 결단.
문학이 이렇게 구체적인 실천 윤리를 품을 때
시 한 편은 한 권의 철학서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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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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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사유의 깊은 결을 품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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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인 시인의 시는 흙과 바람, 도구와 사람의 자리를 정확히 놓아준다.
그 방식은 동양 사유의 근본과도 닿아 있다.
이름을 바로 세우는 정명,
허상을 벗겨내는 무상,
필요한 것을 남기고 불필요함을 버리는 무위.
그 모든 흐름이 고요하게 스며들어있다.
결국 이 시가 말하는 바는 한 가지다.
사람이 중심을 잃지 않으면
어떤 바람도 그를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