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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학박사 정근옥시인-석별, 그날의 저녁별》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정근옥 시인


〈석별, 그날의 저녁별〉


참새들이

떠나간

하늘은

연묵빛 짙게

깔려 가슴이

저리다


파도가 쓸고 간 겨울 바다 위에

한없이

깜빡이는

별빛


어머니가

심어놓고

떠난

도라지꽃,

그 보랏빛

그리움

한 잎


얼음장보다

차갑게

철썩이는

물결 위에

아른거린다


푸른 천에

수놓아진

낯익은

고향 산 빛,

새벽마다

하얀 눈물로

적셔진다


************


〈석별, 그날의 저녁별〉


문화평론가 박성진



이 시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간 텅 빈 하늘에서 시작된다. 참새들이 떠난 자리, 그 공허한 하늘에 드리운 연묵빛은 자연의 색이면서 동시에 상실의 그림자이다. 시인은 그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슴 한편이 저려오는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이 저림은 곧 ‘석별’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이별의 서늘한 기척이다.

모든 상실은 아주 작은 출발점에서 시작되지만, 그 여운은 늘 하늘만큼 넓게 번져 나간다.


겨울 바다를 스치는 파도 위에서 깜빡이는 별빛은 정서의 균열을 만들어낸다.

겨울 바다는 생명력을 거두어들인 긴 계절의 표정이고, 그 위에 떠 있는 별빛은 바다보다 더 멀리서 오는 시간의 흔들림이다.

이 대비는 차갑고 텅 빈 풍경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기억의 미세한 떨림을 보여준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저녁별’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작게 반짝이는 마음의 잔불처럼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시의 정서적 중심은 결국 ‘어머니’라는 단어에서 절정으로 도달한다. 어머니가 심어 놓고 떠난 도라지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기억의 씨앗이자 존재의 근원이다. 도라지의 보랏빛은 흔한 색이 아니라 오래된 영혼의 색이며, 땅속에 뿌리를 내리는 생명체의 성질처럼 어머니의 사랑이 남겨진 이의 심장 속에 깊이 스며 있다는 상징을 품는다. 그리움 한 잎이라는 표현은 특히 인상적이다.

이 한 잎은 살아 있는 꽃잎이 아니라, 시인의 가슴 어딘가에서 천천히 말라가며도 끝내 떨어지지 않는 추억의 잎이다.


얼음장보다 차갑게 철썩이는 물결 위에 아른거리는 도라지의 기억은, 추모와 기억이 얼음처럼 선명하고도 흔들린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아픔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의 냉기 속에 스며든 기억의 흔들림을 그대로 담아낸다. 시인이 바라보는 겨울 바다는 실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직 얼어붙지 못한 눈물의 바다이기도 하다.


마지막의 고향 산빛은 시 전체의 배경을 넓히는 장면이다.

푸른 천에 수놓아진 산빛이라는 표현은 자연을 실제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새겨진 ‘심상으로서의 고향’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낯익은 산빛이라는 말은 정체성의 뿌리를 가리킨다.

그 뿌리는 이미 몸을 떠나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유년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존재의 본향이다.


새벽마다 하얀 눈물로 적셔지는 고향의 산빛은 시인이 지닌 삶의 정서가 얼마나 깊고 투명한지를 보여준다.

새벽의 눈물은 감상을 넘어 실존의 진실에 가깝다. 낮의 눈물은 감정이지만 새벽의 눈물은 존재다.

시인의 기억은 새벽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서 가장 맑은 빛으로 되살아난다.

하얀 눈물은 희고 순해서 오히려 더 슬프다.

그 눈물은 상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떠난 존재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다시 불러오는 의식에 가깝다.


이 시의 전체 구조는 서사 중심이 아니다. 장면들이 물결처럼 짧게 이어지며, 각 연은 독립된 이미지의 조각처럼 제시된다.

하지만 그 조각들이 모이면 하나의 거대한 기억의 풍경이 완성된다. 시인의 기억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으며, 오히려 파편처럼 반짝이며 떠오른다.

그 파편적 구성은 이 시의 정서를 더욱 깊고 선연하게 만든다.


언어는 간결하지만, 그 간결함 속에 신중함과 절제가 있다. 불필요한 장식이 없기에 여백이 넓고, 그 여백은 독자가 자신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정근옥 시인의 시는 감정의 부풀림 대신 이미지의 선명함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시의 품격을 높이고, 그리움의 결을 더 정교하게 만든다.


결국 저녁별은 사라진 영혼의 마지막 신호처럼 읽힌다.

낮과 밤 사이,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 가장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빛. 어머니가 남긴 기억과 고향의 산빛, 그리고 새벽의 눈물이 모두 이 저녁별의 성질을 닮아 있다. 저녁별은 떠난 존재가 전하는 짧고 고요한 인사이며, 동시에 남겨진 이가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남겨지는 미약한 빛이다.


자연과 감정의 경계가 흐릿해진 이 시에서, 모든 자연은 시인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하늘, 바다, 별빛, 꽃, 산. 이 모두는 한 사람의 생애와 그리움이 자연의 형태로 되돌아온 모습이다.

이 시는 결국 석별이 끝이 아니라 회귀임을 말한다.

떠난 자는 사라지지 않고 자연 속에서 다시 만나고, 그 모습을 통해 남은 자는 또 하루를 견디어낸다. 석별, 그날의 저녁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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