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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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라, 이 나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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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江 김석인
이 나라여, 정신 좀 차려라.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의 피, 하나의 말로 살아온 우리가
남과 북, 서로의 가슴에 돌을 던지며
또 동서로 갈라져 서 있구나.
누구 좋으라고
형제를 미워하고
누구를 이롭게 하자고
이념의 깃발을 서로의 목에 겨누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해 늦가을 스무날,
장지연 선생이 황성신문에 붉은 피로 쓴
“이 날에 목 놓아 우노라”
그 절규는 나라를 팔아넘긴 자들을 향해
가슴을 찢어 부르짖은 통곡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나라를 외세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흔들고 있지 않은가.
둘로 갈라진 말,
셋으로 찢어진 마음,
민족의 뿌리를 잊은 눈빛들이
이 땅을 다시 비틀고 있지 않은가.
정신 차려라, 이 나라여.
정치인의 욕심만도 아니다.
언론의 소란만도 아니다.
이웃과 친구, 가족이 서로 등을 돌리면
그것이 곧 나라가 무너지는 길이다.
미움은 미움을 부르고
분열은 문을 열어
해는 그 틈으로 스며든다.
정신 차리지 못한 나라의 코는
언제든지 베어갈 수 있다.
역사는 이미 그 사실을
핏빛으로 증명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울지 않으면
후손이 울게 된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이 땅은 또다시 빼앗긴다.
이 나라여,
다시 한번 마음을 모아라.
서로의 손을 붙잡아라.
사람이 사람을 지켜야
나라가 나라로 선다.
장지연의 통곡을
오늘의 바람 속에서 다시 듣는다.
“동포여, 정신 차려라.
깊이 잠든 이 나라의 혼을 깨워라.”
그러니 우리여,
다투지 말자.
갈라서지 말자.
진실을 가리고, 분열을 부추기는 손길에
더는 놀아나지 말자.
이 나라가
우리의 자식과 손주에게
영원히 밝은 하늘이 되도록
지금, 바로 지금
정신 차려라
이 나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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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가진 ‘직설의 용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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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江 감돌인의 〈정신 차려라, 이 나라여〉는 오늘 한국 사회의 균열과 분열을 향한 일종의 “호명시”이자 “각성 시”다.
이 시는 직설적이다. 그것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깊은 잠에 빠진 가족을 깨우듯, 흔들리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의 문턱에서 울리는 절박한 목소리에 가깝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고발이나 비난이 아니라 “동포여, 우리 스스로 깨어나자”는 시인의 내면적 탄식에서 나온다.
이 목소리는 상대를 탓하기보다, 우리 모두의 내부를 향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다.
한국 사회의 갈등이 누구의 책임인가를 묻기 전에, 가장 오래된 질문을 먼저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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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라, 이 나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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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문장에 담긴 감정은 거칠지 않다.
오히려 뼈마디가 시리도록 절실하고, 어른이 아이에게 들려주는 훈계 같은 온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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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에서 한라까지’ 뿌리를 부르는 첫 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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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은 ‘민족의 뿌리’를 다시 소환한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어지는 한 핏줄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한 감상적 민족주의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이 구절은 오늘의 분열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상반된 상징 구조를 만든다.
백두와 한라가 하나라는 사실은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기억의 연속성과 문화적 감각의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하나의 선이 남과 북, 동과 서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이 첫 연은 곧바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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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의 가슴에 왜 돌을 던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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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은 분노가 아니라 자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현실은 외부가 만든 것도 있지만,
오늘은 내부에서 더 깊이 침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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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 좋으라고’라는 질문의 정치적 성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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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단순한 대중적 표현 같지만, 매우 철학적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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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좋으라고 형제를 미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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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음은 실제로는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대립의 기원을 추적하는 문장이다.
형제의 싸움은 언제나 제삼자의 잇속으로 끝났다.
역사적 경험은 여러 번 반복되어 왔다.
시인은 이념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념의 깃발을 “서로의 목에 겨누는 행위”가
무엇을 파괴하는지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비인간적 언어가 아닌, 생활인의 언어를 쓴다.
이 때문에 독자는 이념 담론에 갇히지 않고,
촌부의 말이나 종가 어른의 충고처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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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의 ‘통곡’을 오늘의 거울로 끌어오는 역사적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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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정신적 중심축은 바로 장지연의 “이 날에 목 놓아 우노라”이다.
시인은 장지연을 단순히 인용하지 않는다.
그를 “지금 이 시대의 거울”로 가져온다.
장지연의 절규는 외세에 나라를 빼앗긴 분노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오늘은 그 외세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나라를 흔들고 있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 시의 가장 깊은 경고가 드러난다.
역사적 사건을 끌어오는 문학적 행위는 자칫 과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그 부분을 매우 절제한다.
장지연의 절규와
지금의 내적 분열을 겹쳐 놓음으로써
시인은 “같은 비극이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는 중”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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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하나의 감정으로만 보지 않는 ‘사회적 시인’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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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분열을 단순히 “감정”으로 보지 않는다.
여기엔 사회 구조의 문제, 정치적 언어의 파편화,
그리고 그로 인해 일상 속 인간관계까지 틈새가 생기는 현실이 모두 포함된다.
“이웃과 친구, 가족이 서로 등을 돌리면
그것이 곧 나라가 무너지는 길이다.”
이 문장은 정치 담론이 아니라 인간학적 명제에 가깝다.
국가란 제도나 조직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정확히 짚어낸다.
이 구절이 강한 이유는 단순 경고가 아니라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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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
도덕적 명제의 시적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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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은 미움을 부른다.”
이 간단한 문장은 윤리학의 오래된 진리를 품고 있다.
또한 문학의 가장 단순하면서 강력한 진술이기도 하다.
미움이 고립된 감정이 아니라
정치와 언론의 소란을 타고 증폭될 때,
그 틈으로 세력과 폭력이 스며드는 구조를 시인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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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구절,
“정신 차리지 못한 나라의 코는 언제든지 베어갈 수 있다.”
이 표현은 충격적이지만 과하지 않다.
역사가 증명한 현실적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시의 기조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문장이다.
이전까지는 호소였다면,
여기서는 역사적 증거를 기반으로 한 경고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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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손의 울음과 기억의 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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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울지 않으면 후손이 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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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책임의 계승에 대한 시인의 깊은 고민을 보여 준다.
역사란 단절이 아니라 기억의 연쇄라는 사실을 시인은 꿰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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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이 땅은 또다시 빼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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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기억의 윤리와 실천의 윤리를 동시에 포함한다.
기억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
그 죄는 후대에게 고스란히 남겨진다.
이 시가 단순한 정치적 메시지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억을 행동으로 바꾸려는 내면의 윤리적 호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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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사람을 지켜야’라는 공동체 윤리의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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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핵심 문장은 결국 다음이다.
“사람이 사람을 지켜야 나라가 나라로 선다.”
이 문장은 거창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一句가 품고 있는 개념은 매우 깊고 넓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조건으로
시인은 제도나 정책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공동체 윤리의 가장 본질적인 선언이다.
사람이 사람을 지키지 않을 때,
아무리 강한 제도나 군사적 힘도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이 점에서 시인은 공동체의 핵을 정확히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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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지연의 ‘혼’을 오늘의 바람으로 옮겨오는 시적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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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의 통곡을 오늘의 바람 속에서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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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서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시공간으로 접합시킨다.
역사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창문을 흔드는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과거의 통곡이 오늘의 거울로 다시 나타난다면,
그것은 단지 회상이 아니라 경고이자 호소다.
시인은 이 접합을 통해
오늘의 위기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반복임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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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의 ‘손을 맞잡자’는 문장에 담긴 인간적 진심>
결말에서 시인은 분노나 비웃음으로 시를 끝내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이 나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