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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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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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泉 모상철
갈잎이 비비고 부서지는 날
불현듯 찾아왔구나
고혹한 향기를 흩트리며
그 임 떠나간 자리에 앉았다
싱그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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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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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행의 “갈잎이 비비고 부서지는 날”은 계절 묘사를 넘어 마음의 내면이 갈라지는 순간을 잡아낸다. 갈잎은 지나간 시간을 상징하고, 비비고 부서지는 소리는 화자의 가슴속에서 스스로 마찰되며 깨지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풍경을 빌려 정서를 드러내는 방식이 매우 절제되어 있고, 그 절제가 오히려 정서의 깊이를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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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불현듯 찾아왔구나”라는 짧은 한 줄은 그리움의 도래를 갑작스러운 파동처럼 묘사한다. 그리움은 언제나 예고 없이 밀려오고, 찾아올 때마다 오래된 상처의 옛 결을 다시 드러내게 한다. 어미의 여운 속에는 반가움과 체념이 동시에 묻혀 있어, 만나지 않았으나 늘 존재해 온 감정의 회귀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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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향기를 흩트리며”라는 구절은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동시에 가장 슬픈 장면이다. 고혹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강렬한 매혹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향기는 고요히 머물지 않고 흩어진다. 흩트린다는 동사는 안정되지 못한 기억,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잔향,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흔들림을 상징한다.
떠난 존재가 남긴 향길수록 더 짙게 남는 역설을 정교하게 담아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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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임 떠나간 자리에 앉았다”는 시 전체의 핵심이다. 님이 떠난 장소는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다.
화자가 그 자리를 직접 찾아와 앉는 행위는 ‘부재를 몸으로 다시 경험하는 행위’이며, 부재를 통한 존재 확인의 순간이기도 하다. 비어 있는 자리의 공기가 오히려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여백의 미학이 이 구절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시인은 설명하지 않고, 직접 그 자리의 온도를 독자가 느끼도록 열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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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의 “싱그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는 정서적 반전이자 이 작품의 장엄한 결말이다. 싱그러움은 생명력과 기쁨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온다. 기억이 시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생생함이 화자를 찌른다. 아름다움이 아픔이 되는 역설, 살아 있는 기억이 가장 날카로운 순간을 이 짧은 한 줄이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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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이 시는 과장된 표현을 피하고 담백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절제 아래 응집된 감정은 상당히 농밀하다. 떠난 사람을 직설적으로 부르지 않고 자연과 향기, 자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한국 서정시의 정통적 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태도다. 짧은 행들이 여백 위에서 서로 울림을 주고받으며, 그리움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조용히, 그러나 깊게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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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상철 시인의 시는 짧지만 슬픔을 크게 울부짖지 않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용히 오래 남는 그리움의 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