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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김선우 시인-자작나무》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자작나무


김선우 시인


흰 두루마기

빽빽이 늘어진 원대리 산자락


계절 따라 갈아입지 못해도

순백의 자존심 잃지 않고

한 겹 두 겹

억압의 굴레 벗으며

민족의 자긍심 내비친다


매서운 삭풍에도 쓰러짐 없이 곧추세우며

창살 없는 창공을 향해 격렬히 써 내려간다


자유란 두 글자

하늘빛 담은 눈망울

모름지기 독립을 갈망한 응분이 맺혔다

꺾이지 않은 굽힘은 우리의 기상이다

흰 두루마기 핏빛으로 짓이겨도

조국의 광복은 밝아온다


자작나무 굽힘만큼 펴질 때

독립의 열망 드높이 더 멀리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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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평론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는 상징의 시학



김선우 시인의 자작나무는 자연시를 가장하고 등장하지만, 실은 민족의 원형적 기상을 되살려놓은 한 편의 정신사적 작품이다. 자작나무라는 단일한 형상 속에 백의민족의 정체성, 굴복하지 않는 기상, 독립의 열망, 역사의 층위가 겹겹이 담겨 있다. 자연 묘사 너머에서 이 시는 민족의 기억을 다시 부르는 의식이자, 과거의 영혼들을 숲 위로 다시 세우는 일종의 시적 제례에 가깝다.


흰 두루마기라는 선언성

첫 연의 흰 두루마기는 자연의 색이 아니라 민족의 몸이며, 민족의 숨결이다.

흰색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정직과 절제, 순결과 초연함, 제의적 엄숙함까지 아우르는 한국적 미학의 원형이다. 빽빽이 늘어진 자작나무 숲은 그 자체로 백의민족의 균열처럼 서서, 역사의 침묵을 감당하고 또 다음 시대를 지켜보는 방풍림과 같은 깊은 상징성을 획득한다.


겹의 서사와 시간의 누적

한 겹 두 겹이라는 표현은 자작나무의 생물학적 구조를 넘어 시간의 층위를 의미한다. 이 겹들은 단순한 자연의 무늬가 아니라 고난을 견디며 새겨진 민족사의 깊은 결이다. 억압의 굴레를 벗는다는 구절은 자연의 성장 과정이면서 동시에 민족이 겪어온 시련을 꿰뚫는 역사적 비유다.

이 부분에서 시는 자연의 서사를 민족의 서사로 치환하는 탁월한 시적 전환을 이룬다.


삭풍과 곧추세움의 의미

매서운 삭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자작나무의 자세는 저항의 몸짓이자 정신의 직립이다. 곧추세우는 동작은 윤리적 태도이며, 민족의 기개가 자연 속에서 구현되는 순간이다.

자연의 몸이 역사와 정신의 몸으로 바뀌는 이런 전환은 전통 저항시의 계보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창살 없는 창공이라는 역설

겉으로는 열려 있고 자유로워 보이나 실제로는 억압이 도사린 공간을 시인은 창살 없는 창공이라고 명명한다.

해방 이전의 조선은 바로 이러한 모순된 자유 속에 존재했다.

이 구절을 통해 시인은 자연의 나목 위에 억압의 시대를 투사하고, 나무의 세로 결을 써 내려가는 글로 읽어낸다. 자작나무의 껍질이 곧 시대의 육필이 되는 장면이다.


자유라는 두 글자의 무게

하늘빛 담은 눈망울은 순수한 영혼이며, 독립을 바라는 끝없는 염원이다.

응분이 맺혔다는 표현은 고통의 응어리이자 정의의 요구이며, 되찾아야만 하는 마땅한 권리를 상징한다. 이 대목에서 시는 자연, 역사, 윤리·정신이 한 중심축으로 모여드는 심장부에 도달한다.


굽힘이라는 역설의 승화

꺾이지 않은 굽힘은 이 작품의 절창이며 핵심 사상에 해당한다. 굽힘은 굴복이 아니라 생존의 지혜이고, 꺾이지 않기 위해 잠시 몸을 낮추는 생의 본능이다. 자작나무가 굽힘을 통해 자신을 지켜내듯, 민족 역시 굽힘의 시간을 지나 다시 일어섰다.

이 부분은 굴복과 재기의 경계를 해석하는 탁월한 은유로 읽힌다.


핏빛 위의 광복

흰 두루마기가 핏빛으로 짓이겨지는 장면은 민족이 겪은 수난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 바로 뒤에서 조국의 광복은 밝아온다라는 문장이 등장하며, 죽음과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선언한다.

이 구조는 고난의 역사에서 도약을 끌어내는 한국적 비극미의 핵심을 정확히 구현한다.


굽힘에서 펴짐으로

마지막 연은 예언처럼 울린다. 자작나무의 굽힘만큼 펴진다는 말은 고난의 깊이만큼 도약은 커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독립의 열망이 더 멀리 메아리친다는 표현은 과거의 독립을 넘어서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자유의 의미까지 품는다.


종합적 평가

자작나무는 자연시를 가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족의 기상과 고난의 역사, 그리고 광복의 도래까지 한 축으로 엮어낸 정신 시이다. 한국적 색채의 상징성을 기반으로 한 문학적 깊이와 역사의식이 결합된 작품이며, 자연의 몸이 역사 속의 사람들의 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이 시는 독특한 미학적 긴장을 획득한다. 자연과 역사, 상징과 실제, 굽힘과 곧음, 순백과 피의 대비는 이 작품을 뛰어난 상징시로 만들어낸다.


이 시는 자작나무를 통해 한 민족의 영혼을 다시 세우고, 잃어버렸던 시간의 존엄을 되찾게 하는 시적 의식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자작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한국인의 영원한 정체성과 기개의 기호이며, 역사의 상처를 넘어 미래를 일으켜 세우는 정신의 기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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