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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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회색 천둥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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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조 시인
나이 들면 잠이 없다지만
모르는 소리
기력이 쇠하는 날은
햇살이 눈총을 쏘는 때까지
혼곤한데
어둔 새벽녘
천둥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회생이다
겨울비가 오려나
눈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
몸이 컨테이너라면
항해의 끝 자락 텅 빈자리에
천둥소리 가득 채워 넣고
바다로 두둥실 나갈 기세
송곳 햇살의 간섭이나 잔소리도 없는
나만의 회색지대에서
으르렁대는 천둥소리는
내 흘러간 천만 가지 기염이다
노년의 새벽이여
항상 회색 우레의 날이기를
기어코 겨울비
이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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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조 시인의 〈겨울 회색 천둥소리〉에 대한 심층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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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새벽의 회색 천둥이 드러내는 내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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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겨울 풍경을 묘사하는 자연시가 아니다.
겨울, 회색, 천둥이라는 세 개의 상징을 하나의 정조로 묶어내며, 노년의 생을 뒤흔드는 내적 회생의 순간을 보여준다.
특히 회색과 천둥의 결합은 한국 현대시에서 보기 드문 조합으로, 노년의 감각과 생의 역설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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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잠이라는 통념을 부정하는 역설의 첫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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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잠이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모르는 소리”라는 단정으로 그 통념을 뒤집는다.
노년의 피로는 잠 부족이 아니라, 하루의 피로를 안고 살아가는 심신의 농밀한 무게로 표현된다.
그 무게는 ‘햇살이 눈총을 쏘는 때까지’ 혼곤함으로 이어져, 시인은 노년의 현실적 피로를 정직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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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천둥을 회생으로 듣는 독창적 청각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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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회생이다.”
이 대목은 시 전체의 중심축이다.
일반적으로 천둥은 위협, 불안, 사건의 전조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시인은 이 천둥을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깨우는 회생의 소리로 번역한다.
이 전환은 자연의 소리를 내면의 언어로 끌어오는 시인의 독특한 청각적 감식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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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와 눈의 대비----노년이 꿈꾸는 ‘새로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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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는 젖고 무겁지만, 눈은 세상을 밝히며 흔적을 덮는다.
시인이 “눈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라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눈은 노년에게 드문 ‘새롭게 덮이는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감각을 기다리고, 새로운 하루를 희망하는 노년의 의지가 이 한 행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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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로 비유된 노년의 육체-삶의 짐과 항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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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컨테이너라면”이라는 표현은 매우 탁월한 자아 이미지다.
컨테이너는 짐을 싣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삶의 상징이며,
노년의 육체적 피로와 생애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텅 빈자리에 천둥소리 채워 넣고 바다로 나갈 기세”라는 말은,
비어 가는 노년의 몸속에 다시 생을 채워 넣어 새로운 항해를 떠날 의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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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간섭’이라는 파격적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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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흔히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시인은 이 햇살을 “송곳 햇살의 간섭이나 잔소리”로 규정한다.
이는 세상의 충고, 타인의 기대, 외부의 시선 등이
노년에게 때때로 짐이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짚어낸 표현이다.
따뜻한 빛이 오히려 간섭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노년 문학에서 자주 다루지 않는 사실적 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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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지대-- 노년의 고유한 내면의 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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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회색지대”는 무기력이나 침묵의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외부의 간섭이 닿지 않는 내면의 성역이며,
흐릿함 속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만나는 사색의 중심이다.
그곳에서 듣는 천둥은 외부의 소리가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생의 잔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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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를 ‘기염’으로 환원시키는 자기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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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는 “내 흘러간 천만 가지 기염”이다.
이 표현은 시의 정점이다.
기염은 젊은 날의 활기, 패기, 생명력을 의미한다.
흘러가 버린 줄 알았던 기세와 기운이
천둥을 통해 회귀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천둥은 외부의 자연현상이 아니다.
자기 역사와 생의 원초적 힘으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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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새벽이여, 항상 회색 우레의 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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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기도와 선언이 동시에 담긴 문장이다.
노년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깨어나는 시간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는 강인하다.
노년의 새벽이 회색 우레의 날이길 바라는 마음에는
지치지 않으려는 생의 끈기, 스스로를 깨우는 의지가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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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로 도착하는 결말 ― 회색 우레에서 맑은 정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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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기어코 겨울비 / 이 아침”은
회색 우레의 긴장을 마무리하는 부드러운 전환이다.
천둥에서 비로 이어지는 변화는
폭발적 생명력이 잔잔한 정화의 상태로 가라앉아 정확한 마무리를 만든다.
감정과 시간, 사유가 하나의 결로 정리되는 아름다운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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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삶을 뒤집는 역설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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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노년에 대한 관습적 묘사를 모두 넘어선다.
노년은 잦아들고, 고요하고, 정적이라는 말들을
시인은 하나씩 반박하며 새로운 노년의 미학을 선언한다.
노년은 여전히
움직이고,
흔들리고,
깨어나는 존재여야 한다.
회색 우레를 가슴에 품은 생의 마지막 항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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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조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노년의 고독을 넘어선 노년의 힘,
쇠락이 아닌 갱생의 가능성,
침묵이 아닌 내적 천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한국 현대 노년시가 새롭게 얻은 또 하나의 좌표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