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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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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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식
사라지는 것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완성이다
온몸 태워 노을에
스며드는 태양처럼
온몸 던져 세월에
순응하는 낙엽처럼
우주의 품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도
저마다 무언가 남기고 사라진다
무엇을 어떻게 남기고 떠날 것인가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울 수
있을까
아직은 미숙아 나의 영혼 세상 즐거움은 순간이라고 죽음을 초월한 위대한 동행
뿐이라고,
뚝뚝 지는 가을 숲에서 조용히 나를 내려놓는다
그 순간이 평화로운 영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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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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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완성은 ‘사라짐’에서 온다는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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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첫 구절은 마치 하나의 유언처럼 다가온다.
“사라지는 것들은 / 아름다운 영혼의 완성이다.”
보통 우리는 남아 있는 것, 계속 이어지는 것, 보존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시인은 시선을 정반대로 돌린다.
형체가 흐려지고, 자취가 희미해지고, 이름이 잊혀가는 그 자리에서
오히려 영혼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사라짐’과 ‘완성’을 나란히 놓는다.
낡은 가치로 보면 이 둘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삶을 깊이 통과해 본 사람에게는,
사라지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고, 가장 다듬어진 시간이 된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것만이 강함이 아니라,
제때 떠날 줄 아는 것, 제때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영혼의 품격이라는 암묵적인 고백이 이 첫 문장 안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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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에 스며드는 태양, 몸을 태워 남기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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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 태워 / 노을에 / 스며드는 / 태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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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하루 내내 빛을 쏟아붓고, 저녁이 되면 노을 속으로 스며든다.
이때 태양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하루 동안 한 일을 길게 설명하지도 않고,
어디 한 번 날 기억해 달라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다 타버린 마음으로
붉은빛 하나 남기고 서서히 물러난다.
시는 그 태도를 영혼의 길로 본다.
온몸을 태운다는 것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끝까지 다 해보고,
그 마지막에 조용히 빛으로 녹아드는 일이다.
이 이미지는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하루를 마감할 때,
상처와 불만만 남기고 스러져가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마음에 노을빛 같은 잔향을 남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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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순응하는 낙엽, 자연이 보여주는 떠남의 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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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 이어 시인은 낙엽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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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 던져 / 세월에 / 순응하는 / 낙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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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오히려 완성된다.
그의 역할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이 아니라,
떨어진 뒤에도 계속된다.
떨어진 낙엽은 흙이 되고,
또 다른 생명을 돕는 보이지 않는 밑거름이 된다.
여기서 ‘순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체념이 아니다.
때가 되었음을 알고,
자신의 자리를 아는 지혜에 가깝다.
한때는 햇빛을 먹고 푸르게 빛나던 잎도
어느 날 문득, 내려놓을 때를 안다.
버티지 않고, 조용히 떨어져 주는 그 태도가
이 시에서 말하는 영혼의 성숙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무대의 한가운데 있을 때보다
무대에서 내려와 다른 세대의 빛을 비춰줄 때,
비로소 삶이 둥글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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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품,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모든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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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품에 / 존재하는 그 / 어떤 것들도 / 저마다 / 무언가 / 남기고 /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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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시의 시야를 한 번 더 넓힌다.
이제 무대는 개인을 넘어, 우주 전체로 퍼져나간다.
우주의 품이라는 표현은
존재를 둘러싼 더 큰 품, 더 넓은 질서를 떠올리게 한다.
그 안에 있는 어느 것 하나도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별은 다 타고나서 흩어진 먼지가 되고,
그 먼지가 모여 또 다른 별과 행성을 만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말, 표정, 손길, 선택 하나가
다른 사람의 삶에 작은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들이 모여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이 시는 말한다.
누구도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방식에는 반드시 어떤 결이 생기고,
그 결이 바로 한 영혼의 초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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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남기고 떠날 것인가”라는 인생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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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 남기고 / 떠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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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줄은 시 전체의 중심축이다.
살면서 우리가 정말 깊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 하나를
매우 간결하게 던져놓는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물음은
재산이나 명예 같은 외적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방향을 잃는다.
보다 근원적인 것은
어떤 마음을 남기고 갈 것인가,
어떤 온도를 남기고 사라질 것인가의 문제다.
나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함께 일했던 이들의 마음에
나는 어떤 표정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이 시는 장황한 설명 대신
짧은 질문 하나로
생 전체를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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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의 평화에 대한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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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모습이 / 얼마나 / 평화로울 수 /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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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결국 ‘마지막 모습’을 향해 다가가는 길이다.
그 마지막이 평화로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살아온 날들의 총합이 말해준다.
마지막 순간은 꾸밀 수 없다.
호흡이 가빠지는 그때,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고 해서
영혼이 평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평화로운 마지막은
살아 있는 동안 조금씩 마음을 정리해 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고,
고마움을 표현할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집착할 것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하루를 쌓아온 사람에게 찾아오는 얼굴이다.
시인은 바로 그 지점을 묻는다.
“나는 마지막에 평화로운 얼굴을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곧,
“그렇게 살아왔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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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아’라 부르는 나의 영혼, 정직한 자기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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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 미숙아 / 나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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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이 주는 울림은 깊다.
자기 영혼을 ‘미숙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대개 이미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이미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반대의 길을 택한다.
나는 아직 미숙하다고,
아직 배울 것이 많다고,
아직 사랑하는 법을 다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솔직함이 바로 성숙의 출발점이다.
자신을 미숙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조금씩 성장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 대목에서 시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담담한 자기 성찰의 톤을 유지한다.
그래서 더 믿을 만하고, 더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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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즐거움의 ‘순간성’과 영혼이 붙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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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 즐거움은 / 순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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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즐거움은 대부분 짧게 스쳐 지나간다.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풍경,
그 어떤 것도 오래 붙잡을 수 없다.
시인은 이 사실을 한탄처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한 인식으로 받아들인다.
순간이라서 헛된 것이 아니라,
순간이라서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시의 방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순간 즐거움의 뒤편에서,
영혼이 무엇을 끝내 붙들고 가야 하는지 묻는다.
짧은 기쁨에 취해 살다 보면
정작 영혼의 나침반은 잃어버리기 쉽다.
시인은 그 흐름을 조용히 멈춰 세우며,
“진짜 오래가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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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초월한 ‘위대한 동행’이라는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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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초월한 / 위대한 동행 /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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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시 전체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부분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동행의 또 다른 방식이라는 믿음.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
하나님의 품이든, 우주의 품이든,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절대적 존재와의 관계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깊은 신뢰가
여기 있다.
이 동행이 있기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이 동행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마지막 순간을 향해서도
조금은 더 평온하게 걸어갈 수 있다.
시인은 이 동행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위대한 동행”이라고만 말하고,
그 나머지는 독자의 믿음과 경험에 맡긴다.
오히려 이 여백이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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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숲에서 나를 내려놓는 장면, 삶의 마지막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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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뚝 지는 / 가을 숲에서 / 조용히 나를 /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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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숲은 늘 떠남의 계절이다.
나무는 잎을 내려놓고,
바람은 온기를 내려놓고,
하늘은 여름의 푸름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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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가운데서 시인은
자신도 이제 무엇인가를 내려놓아야 함을,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이 평화로운 영혼을 위하여
삶의 끝을 고민하는 시의 마지막 부분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게 하는 삶의 물음표를 던지며 고백하는 시인의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