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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법정스님의 산문 세계-비움의 윤리와 고요의 미학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법정스님 산문 세계 – 비움의 윤리와 고요의 미학>


박성진 문화평론



<비움의 첫 빛, 무소유의 정신>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단순히 소유를 버리라는 수행자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 글의 핵심은 ‘버림’이 아니라 마음의 위치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스님은 세간의 욕망을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욕망이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은근히 구속하는지를 맑은 언어로 드러낸다.

소유를 늘리는 데 익숙한 시대에, 스님의 문장은 소유가 많아질수록 움직임의 자리가 줄어든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 비움은 가난이 아니라 자유의 시작이다.


<욕망 이후의 침묵, 마음의 해방>


〈무소유〉를 천천히 읽으면, 어느 순간 문장이 아니라 침묵이 말하는 자리가 열린다.

이 침묵은 억지로 만든 수행의 정적이 아니라, 불필요한 집착이 빠져나간 뒤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고요이다.

스님은 이 고요를 통해 인간이 본래 지닌 내면의 맑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맑음은 결코 신비롭지 않다.

사람을 가볍게 하고,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삶을 단정하게 만드는 아주 일상의 미학이다.


<텅 빔의 충만, 텅 빈 충만의 역설>


〈텅 빈 충만〉에서 스님은 ‘비어 있음’이야말로 가장 깊은 충만이라는 깨달음을 내민다.

이 글은 단순한 역설의 문장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의 대전환을 담고 있다.

채움에 익숙한 현대인이 놓치고 있는 것은, 진짜 충만은 갖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음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스님의 비움은 결핍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 새로운 숨결, 새로운 관계가 들어오는 열린 공간이다.

그 열린 공간이 인간을 다시 일으킨다.


<고요의 미학> 흔들리지 않기 위한 방편


법정스님의 글에는 항상 고요한 결이 있다.

그 고요는 외부의 소리를 거부하는 침묵이 아니라,

세상의 소음이 자기 안에서 뜻을 잃고 사라지는 자연의 침잠이다.

스님은 사람들이 복잡한 질문 속에서 길을 잃을 때,

말을 덜고, 욕망을 덜고, 소유를 덜어낼수록

하나의 본질만 남는다고 말한다.

그 본질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어서

가장 어두운 밤에도 사람을 흔들리지 않게 한다.


길 위의 인간학

〈길은 걷는 사람의 것이다〉


이 글은 수행자의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산문이다.

길 위에서 걷는 행위는 스님에게 삶과 존재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걸으면 마음도 따라 정리된다”는 문장은 결코 가벼운 한 줄이 아니다.

삶의 본질은 대단한 순간에 드러나지 않고,

고요하게 걷는 작은 움직임 속에서 모습을 보인다.

삶을 ‘달리기’로 오해하는 시대에, 스님은

“길은 걷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작은 진실을 되살린다.

그 길에서 사람은 자기에게 돌아온다.


<자연의 스승> 바람, 풀, 물소리의 철학


스님의 산문에는 자연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스승으로 등장한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수행의 호흡이 되고,

풀잎 흔들림이 마음의 흔들림을 비추는 거울이 되며,

물소리가 번잡한 생각을 씻어내는 수행이 된다.

스님은 자연을 신비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의 단순함 속에 삶의 본질이 언제나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단순함이 인간을 치유한다.



<관계의 윤리, 소유 없는 사랑>


〈무소유〉가 삶의 태도라면,

스님의 글 전반에 흐르는 것은 관계의 윤리이다.

사람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사랑,

기대와 요구를 줄여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

말을 줄이고 들음을 늘리는 사랑.

스님은 관계가 망가지는 이유를 명확히 본다.

관계를 소유하려 할 때, 즉 ‘너는 내 것이다’라고 속삭이는 순간

사람은 서로에게 짐이 된다.

비움의 윤리는 곧 사람을 가볍게 하는 사랑의 기술이다.



<고독의 밝음, 혼자 있음의 기품>


법정스님은 고독을 외로움이 아니라 존재가 제 빛을 찾는 시간으로 보았다.

그의 산문에는 혼자 있음의 시간이 자주 등장한다.

그 고독은 사람을 비틀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가지런하게 정리하여

상처를 가라앉히는 잔잔한 약이 된다.

스님에게 고독은 은둔이 아니다.

삶을 밝히고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내면의 등불이다.


<빛으로 남는 문장들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법정스님의 글은 시대가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그의 글은 인간 내부의 본질적 문제, 집착, 욕망, 두려움, 고독을

가장 단순한 언어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오늘의 독자가 그의 글을 다시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님의 문장은 삶을 꾸미지 않으며,

수행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조금 덜어놓고, 조금 멈추고, 조금 가볍게 살아보라”라고 말한다.

이 단정함의 도리와 진리는 오늘의 혼란 속에서 가장 오래 남을 법정스님의 오랜 흑백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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