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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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부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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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 이순옥
쑥익은 가을밤을 한 올 베어내
짙은 겨울눈으로 응시한다
아직은 위험한 매혹이다
누군가에겐 치사랑의 희망이었을
답지 않게 말을 늘렸다
흘러가는 바람도 흘려보내고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설익은 꿈 조각도 실었다
때 묻은 기억을 슬며시 끄집어낸다
잔 먼지가 날려 목울대가 받은 기침을 낸다
오래된 세월만 카케히 쌓은 케케묵은 소리
천천히, 터벅터벅
가을이 낙엽 한 잎으로 숨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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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부르는 소리는 자연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자연의 풍경을 빌려 인간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은 시다. 계절이 외부에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이 시에서 계절은 오히려 내면에서 먼저 움직인다. 가을이 저문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저무는 가을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어떤 진동을 일으키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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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첫 구절은 이미 독자를 한 계절의 끝자락으로 이끈다. 쑥익은 가을밤을 한 올 베어낸다는 표현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마음의 결을 자르는 행위에 가깝다. 무언가를 정리해야 하는 순간, 혹은 오래 머물렀던 감정을 떼어내야 하는 순간에 우리는 이렇게 ‘한 올’을 뽑아내는 심정과 마주한다. 시인은 이 섬세한 느낌을 가을이라는 배경에 얹어 놓음으로써, 계절의 움직임이 아니라 감정의 움직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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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대목에서 겨울눈은 차갑게 빛난다. 겨울의 눈빛은 어떤 판단을 담고 있는 듯하고, 또한 시인 자신의 심연을 바라보는 매서운 응시처럼 느껴진다. 이 겨울의 응시는 자기 자신을 향한 대면이며,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동시에 살피는 내면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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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위험한 매혹’이라는 표현은 이 시의 감정결을 드러내는 핵심이다. 겨울은 늘 두 가지 얼굴을 가진다. 얼어붙은 풍경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외로움과, 그 외로움 속에서 되살아나는 희망. 누군가에게 치사랑의 희망이었던 계절은, 동시에 또 다른 이에게는 비수 같은 침묵으로 다가온다. 이 양가감정 속에서 시인은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계절의 기운을 어루만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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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화자가 바람을 보냈다가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꿈 조각을 실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계절은 순환하고 감정도 순환한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인간의 감정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바람이 한 번 불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도 어느 날 조용히 되돌아온다. 설익은 꿈은 완성되지 못한 희망이며, 다 하지 못한 마음이다. 시적 화자는 그 마음을 억지로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람에 맡겨 둔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받아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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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묻은 기억을 슬며시 꺼내는 장면에서는 오래된 서랍을 여는 듯한 섬세한 떨림이 있다. 기억은 누구에게나 조심스럽다. 그 기억을 꺼내는 순간 바람이 먼지를 쓸어 올리듯 기침이 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오래 덮어 두었던 감정은 꺼내는 순간 언제나 작은 흔들림을 낳는다. 이 연은 기억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을 매우 잘 잡아낸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중간의 정조가 시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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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에서 가을이 낙엽 한 잎으로 숨을 놓는다는 표현은 계절의 죽음이 아니라 계절의 숨결에 가깝다. 낙엽은 끝이 아니다. 다음 계절의 문을 여는 합주의 마지막
음이다. 가을이 떠나는 장면을 터벅터벅한 걸음으로 그려낸 것은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하다.
계절도 사람처럼 떠나는 기척이 있고, 그 기척은 언제나 조용하며, 슬프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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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아름다움은 화려한 이미지나 과장된 감정에 있지 않다. 오히려 절제된 표현 속에서 한 계절이 끝나고 다음 계절이 오기까지의 내면의 움직임을 고요하게 담아낸 데 있다. 이순옥 시인은 계절을 노래하면서 감정을 풀어내고, 감정을 노래하면서 삶의 흔적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시는 자연시가 아니라 생의 기록이며, 마음의 사계절을 보여주는 작은 일기장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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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부르는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스스로에게 들리는 소리이며, 조용한 마음의 대화이다.
이 시는 그 조용한 대화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계절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