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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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일기예보〉
김 병장 코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가마솥 밥물 흐르듯 침이 베개를 적신다
태풍 진로가 내 쪽으로 바뀐다고 하자
김 병장은 잠자리 방향을 내 쪽으로 튼다
어김없이 왕바람을 몰고 들어치 친다
바람에 모포도 날아가 오늘도 또 뜨는이다
잠곤대하다 내 이름을 부르며 욕을 한다
귀를 쫑긋하자 시치미를 뚝 떼고 잔다
뿌드득쁘드득 이빨을 갈다 방귀까지 쏜다
어떨 땐 죽은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다가
우레가 치듯 코를 골며 잠자는
김 병장
밤의 일기예보다
매일 먹구름과 천둥이 동반된 흐림이다
언제쯤이면 맑은 날의 예보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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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의 밤, 하나의 날씨로 기록되는 인간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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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병영의 밤을 ‘기상 현상’으로 비유하는 순간부터 독자의 감각을 전면적으로 붙잡는다. 김 병장의 코에서 불기 시작하는 바람, 가마솥 밥물처럼 흐르는 침, 태풍의 진로까지--- 시인은 ‘신체의 소리’를 자연의 기후로 확장하여 묘사한다. 이 표현 방식은 병영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우주적 풍경’으로 확장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한 인간의 숨과 코골이가 거대한 자연 현상으로 번역되는 순간, 병영의 밤은 더 이상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기상 관측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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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속에 감춘 병영의 리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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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는 유머가 가득하다. 잠자리 방향을 내 쪽으로 트는 김 병장, 시치미를 떼는 장면, 갑작스러운 방귀의 등장까지. 그러나 이 유머는 가벼움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병영에서의 강제된 공동체성, 타인의 신체 소음과 함께 살아야 하는 현실, 피할 수 없는 공존의 조건을 드러낸다.
웃음을 머금고 읽지만, 그 아래에는 ‘사적인 공간이 소멸된 병영의 실체’라는 깊은 리얼리티가 뿌리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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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언어로 쓰인 병사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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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중심 발상은 ‘병사의 밤 = 날씨’라는 은유이다.
코 고는 소리는 천둥, 침은 빗물, 숨결은 바람, 잠버릇은 태풍의 진로로 바뀐다.
이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 ‘자연의 언어로 병사의 일기’를 쓰는 방식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통제되지 않는 힘이며, 병영의 밤 또한 마찬가지다.
바람, 천둥, 먹구름처럼 다가오는 소음의 밤은 병사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세계이다.
시인은 그 통제 불가능성을 재치 있으면서도 정확하게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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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한 편의 기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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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코골이, 방귀, 이갈이,
이 모든 것은 의식 바깥의 세계에서 일어난다.
시인은 ‘무의식의 소리’를 시적 장면으로 끌어올려 병영의 풍경을 구성한다.
특히 “죽은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다가 / 우레가 치듯 코를 골며”라는 대목은
‘정적과 폭발’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리듬을 자연의 리듬처럼 보여준다.
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자연과 닮아 있는가,
우리가 밤마다 얼마나 ‘자연의 일부’가 되는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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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의 관계성: 멀어질 수 없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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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병장의 모든 소리는 화자의 바로 옆에서 일어난다.
이 물리적 거리의 좁음은 병영 생활의 핵심이다.
타인의 소리가 나의 밤을 흔들고,
타인의 잠버릇이 나의 예보가 되고,
결국 타인의 무의식이 나의 일상에 스며든다.
이 시는 “이 좁은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날씨가 된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병영은 서로가 서로의 기후이며,
서로의 밤을 지배하는 ‘타인의 소리’가 일상이 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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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일기예보’라는 제목의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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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시의 정수를 압축한다.
밤마다 반복되는 소리의 현상은 마치 내일의 날씨처럼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그 예측 가능성이 곧 평온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매일 흐리고, 매일 먹구름이며, 매일 천둥이 따른다.
병영에서의 밤은 ‘맑아질 수 없는 시간’이자
철저히 타인에게 점령된 시간이다.
이 제목은 병영의 반복성과 단조로움, 한숨과 웃음을 동시에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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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와 체념 사이에서 피어나는 인간적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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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비판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밤을 하나의 예보로 받아들이며,
맑은 날씨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는다.
이 기다림에는 체념도 있지만, 묘하게 따뜻함도 있다.
병영에서의 유머는 서로를 이겨내기 위한 장치이며,
서로의 결점을 수용하는 ‘동료애의 방식’이 된다.
김 병장이 내 쪽으로 잠자리 방향을 튼다는 사실조차
시인은 원망이 아니라 ‘밤의 기상 변화’로 받아들인다.
이 수용의 태도에서 인간적 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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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문학의 한 단면, 소음 속에서 형성되는 공동체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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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단순한 병영 유머가 아니다.
한국의 병영문학이 오랫동안 다루어온 테마로
고립, 강제된 공동체성, 타인의 침범, 그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우정과 인내,
그 모든 요소가 자연스러운 체온을 지닌 채 담겨 있다.
병영의 밤은 전쟁보다 더 긴 침묵과 더 짙은 어둠으로 찾아오며,
그 어둠을 뚫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소리의 풍경이다.
이 시는 ‘병영의 소음’을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전쟁의 엄숙함이 아닌 ‘일상의 진실’을 병영문학 안에 새겨 넣는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언제쯤이면 맑은 날의 예보가 나올까”
이 문장은 웃음 뒤에 은근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드리운다.
병영 밖의 자유, 고요,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향한 미세한 갈망이
담담하게 배어 있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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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병영의 밤을 자연현상으로 확장시킨 독창적 작품이며,
유머와 현실, 체념과 따뜻함을 균형 있게 담아낸
병영생활의 서정적 기록이다.
병영문학의 흐름 속에서도 빼어난 관찰력과 감각적 발상이 돋보이며,
마지막 문장이 여운을 깊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