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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민세 안재홍-나라의 본질을 묻다》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민세 안재홍 사상 평론--- 나라의 본질을 묻는 오래된 목소리〉


박성진 문화평론가


민세 안재홍의 글을 들여다보면 한 시대의 소란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질문이 먼저 떠오른다.

나라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책임을 지는가.

그는 그 물음들에 허둥대지 않고, 느리지만 단단한 숨으로 대답을 이어간 사람이다.

그에게 나라란, 지도를 그려놓고 선을 긋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하루를 견디며 만들어 내는 삶의 결, 그 결들이 모여 자연스레 빚어내는 온기 같은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와 마을을 스치듯, 사람의 숨결이 서로에게 닿아 세상이 조금 따뜻해지는 순간들.

민세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라의 의미를 보았다.

그의 글에는 늘 ‘백성’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서 있다.

조선의 독립을 말하면서도, 그 독립이 누구에게 향해야 하는지 잊지 않았다.

민세가 바라본 조국은 거대한 깃발이 아니라, 고단한 사람 한 명의 등을 조용히 떠받치는 작은 손길에 가까웠다.


그가 즐겨 말하던 대동의 뜻도 그러했다.

대동은 화려한 이상향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지 않는 가장 인간적인 태도였다.

가진 이는 덜어내고, 힘 있는 이는 먼저 엎드리고, 지식인은 자기가 아는 만큼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는 고집.

그 고집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마지막 윤리였다.


지식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정직했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권리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의무를 얻는 일이라고 그는 믿었다.

앎이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할 때, 그 앎은 이미 죽은 지식이라고 했던 말이 지금도 낯설지 않다.

많이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조용해지고, 더 낮아지고, 더 책임감을 가지는 일이어야 한다고 그는 끝없이 되뇌었다.


민세의 사상이 오래 살아남은 까닭은 그가 현실의 고통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맹, 가난, 차별, 억압의 시대,

그 시대가 품었던 상처들을 그는 이상이라는 천으로 덮어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처들 위에 무릎을 꿇듯 앉아, 공동체가 어디서부터 고쳐져야 하는지를 묵묵히 적었다.

그의 글은 아름답기 전에 아팠고, 선명하기 전에 낡은 흙냄새 같았다.

그 현실성 때문에 그의 사상은 아직도 숨이 있다.


물론 민세 안재홍 선생이 지나치게 도덕적이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타협할 수 있는 것과 타협할 수 없는 것이 명확했던 시대에,

그의 도덕은 결벽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가 지킨 원칙은 누구를 꾸짖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너져 가는 조국이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도덕적 뼈대였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민세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도 단순하다.

사람보다 제도가 앞서고, 책임보다 말이 앞서고,

공동체의 숨보다 정치의 소리가 더 큰 이 시대에,

그가 남긴 목소리는 오래된 호소처럼 들린다.


“나라란 서로를 붙드는 마음의 연대다.”


이 단순한 문장이 지금은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민세의 사상은 지금 우리에게 다시 요청된다.

정치나 이념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민세 안재홍은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사람의 편에 서려고 애썼던, 고집스러운 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고집으로 그는 나라의 본질을 지키고자 했고,

그 고집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한 줄의 길이 되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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