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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고려대 명예교수 민용태-외계인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외계인〉


민용태 시인


불멸에의 목마름 Sed de inmortalidad

---미겔 데 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


시는 나이 어린 여린 소녀

La poesia, doncella tierna de poca edad

— 미겔 데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내가 어찌 팔십 선에 섰는가

발은 팔자걸음

숨은 내 안에서 뛰고 있는데

지난 시간에 안방을 다 차지하고

문득 난 밖에 서 있다


황사보다 하늘과 구름이 더 좋다

밤보다 별이 더 좋다

나는 어느 은하에서 왔는가


나이 들수록 은하수에 대한 목마름이 더해간다

젊어지는 샘물은 초등학교 교과서 밖에서 나오지 못한다


교과서는 팔십이 넘으면 남의나이라고 하고

나와 나이는 이미 끝났는가


나이아가라는 하늘 끝까지 손가락질하는데

하늘 끝에서 끝내 떨어지는데

나는 나와 나이 밖에 서서

나이 어린 여린 소녀를 기다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나이의 바깥에서, 시인이 다시 호흡을 고른 자리


민용태 시인의 〈외계인〉을 읽다 보면, 먼저 마음 한쪽에 조용히 내려앉는 것이 있다.

그것은 ‘팔십’이라는 숫자보다, 그 숫자를 바라보는 시인의 표정이다.

덜컥 주저앉는 표정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자기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표정.

그러니까 이 시는 나이를 말하고 있지만, 정작 나이의 지배를 거부하는 시다.

시의 첫머리에 우나무노와 세르반테스가 나오는 이유도

명언을 붙이려는 의도가 아니다.

팔십의 나이에 다시 ‘어린 소녀 같은 시심’을 붙들어보겠다는,

그 조용한 선언처럼 보인다.

이 시의 핵심은 꾸밈이 아니다. 되돌아가려는 노력이다.


“지난 시간이 안방을 다 차지했다.”

이 구절이 참 오래 남는다.

나이를 먹으면, 시간이 마치 주인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방 바깥에 서 있다.

밀려난 건지, 스스로 걸어 나온 건지,

그 사이의 여백이 묘하게 따뜻하다.

적어도, 세월에게 무릎을 꿇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황사보다 하늘이 좋고, 밤보다 별이 좋다는 말은

늙어서 sentimental 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긴 생을 지나오면서 오히려 더 맑은 것을 찾게 되는 시인의 본능이다.

세상의 먼지보다, 저 너머의 빛을 더 선명하게 느끼는 나이.

“나는 어느 은하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은

실은 ‘나는 이제 어디로 기울어 가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가벼운 말이 아니다.


교과서에 갇힌 젊음은 시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팔십이 넘으면 ‘남의나이’라는 사회적 틀도

여기서는 힘을 잃는다.

시인은 이미 그 틀 밖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분석하는 대신,

그 나이를 뚫고 나오는 마음의 결을 보여주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나이아가라’.

이 단어 하나가 시인을 보여준다.

세월을 한 번 비틀어 웃고 넘어가는 오래된 장인의 여유.

그러나 그 여유가 허세가 아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런 농담을 한다.

유머와 슬픔이 같은 그릇에 담겨 있다.

마지막 장면이 이 시의 심장이다.


“나와 나이 밖에서 / 나이 어린 여린 소녀를 기다린다.”


여기서 ‘소녀’는 사람이 아니다.

시의 첫 마음이다.

언어가 가장 투명했던 그 시절의 시인 자신이다.

팔십의 몸으로 다시 그 소녀를 만나려 한다는 건,

생애 끝자락에서 처음의 문을 노크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어떤 외부의 기후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기다림.

시인이 평생 붙들어 온 단 한 가지,

‘시를 쓰겠다는 마음’만큼은 타협하지 않겠다는 고집이다


〈외계인〉이라는 제목도 이제 선명해진다.

지구 밖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이라는 지구 바깥에 선 사람이다.

나이의 중력에서 벗어나 다시 떠오르는 시인의 모습이다.

자기 영혼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오래된 투지이다.

이 시는 노년의 넋두리가 아니다.

노년의 반격에 가깝다.

팔십의 문턱에서 시인은 다시 ‘처음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발걸음은 조용하지만, 기백이 있다. 초년으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기백으로 소녀를 향한 세르반테스가 움직인다.

돈키호테가 되어서...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집 속에 민용태 시인의

시세계가 펼쳐진다. 중력을 벗어난 외계인 시인이 일격을 가한다."나이아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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