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성진 《문학박사 민용태 시인-까르르》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민용태 시인


〈까르르〉


너의 웃음 속에는

배냇아이가 목을 젖히고 웃는다

햇살이 쏟아진다

세상이 허리를 못 쓰고

너의 웃음 밑에 엎드린다


까르르

까짓것 인생 별거냐?

목 젖히고 목숨 젖히고

하늘 맛보고 막 웃기!



웃음이 ‘세계관’으로 펼쳐가는 까르르

의 등장


〈까르르〉는 웃음소리를 제목으로 삼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웃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태도, 즉 삶을 대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해학은 원래 ‘웃기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세계의 무게를 잠시 무력화시키는 지혜다.

이 시 속의 웃음은 그 지혜를 가장 천진한 형태로 드러낸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 배냇아이는 되살아나고, 햇살은 어느 창문보다 더 크게 열리며, 심지어 세상이 허리를 펴지 못한다.

웃음이 현실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웃음 앞에서 순순히 물러나는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다.


‘배냇아이’-----해학의 원초적인 근원


시인은 웃음을 ‘배냇아이’와 겹쳐 둔다.

이 장면은 해학의 기원을 말없이 밝혀준다.

아이가 웃는 순간, 그 웃음에는 계산도, 경계도, 체면도 없다.

그저 존재가 제 몸의 기쁨에 밀려 밖으로 새어 나오는 자연의 소리다.

이 시에서 해학은 바로 그 순수성으로부터 태어난다.


세상이 만든 규칙 이전의 웃음,

사회가 씌워 놓은 굴레 이전의 웃음,

삶의 상처가 굳기 이전의 웃음.


배냇아이의 웃음은

해학이 품은 본래의 자유를 상징한다.



세계를 주저앉힌 미학--- ‘세상이 너의 웃음 밑에 엎드린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단연 이 대목이다.


“세상이 허리를 못 쓰고

너의 웃음 밑에 엎드린다”


이것은 과장처럼 보이지만, 문학적 과장은 실제보다 더 진실한 순간이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어떤 웃음은 진짜로 세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슬픔이 밀려와도, 현실이 버거워도,

누군가의 웃음 하나에 모든 방어가 풀리고, 심장 깊은 곳이 뒤집히는 순간이 있다.

이 문장은 해학의 속성을 정확히 짚는다.


해학은 세계를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가 시의 해학 앞에서 무너진다.


웃음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웃음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해학을 ‘힘’이 아닌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까르르 인생의 버튼을 눌러 유쾌하게 살려는

의성어의 시적 반란>


후반부는 이 시의 정서가 완전히 열린다.


“까짓것 인생 별거냐?

목 젖히고 목숨 젖히고

하늘 맛보고 막 웃기!”


여기서 해학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운명 앞에서의 발랄한 항거가 된다.

인생의 무상함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에 더욱 마음껏 웃어버리는 태도.

‘목 젖히고’와 ‘목숨 젖히고’의 병치는 특히 절묘하다.

삶을 조금 과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해학의 본래 방식이다.

웃음을 통해 생을 되돌리고,

가벼움을 통해 무거움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하늘 맛보고 막 웃기!”>


이 순간, 웃음은 더 이상 현실의 반응이 아니라

인생을 다시 여는 버튼이 된다.

웃음은 생의 선언이자, 자유의 시작이다.


<이 시의 미학은 가벼움이 무거움을 이기는 것>


미학의 측면에서 이 작품은 ‘가벼운 말투’와 ‘큰 의미’를 의도적으로 겹쳐 놓는다.


*웃음과 배냇아이

*햇살과 하늘


이 모든 이미지는 무거움과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그 가벼움의 표면 아래에는

삶의 고단함을 휘감아 무너뜨리는 힘이 숨겨져 있다.

해학은 원래

가벼움의 얼굴로 무거움을 이기는 예술이다.

〈까르르〉는 그 원리를 가장 단순한 문장으로 완성한다.

웃음은 시적 장식이 아니라, 존재를 구원하는 힘이다.



<해학은 삶의 체념이 아닌 삶의 끈>


많은 사람은 웃음을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에서의 웃음은 그 정반대다.

웃음은 현실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깨우는 방식이다.


“까짓것 인생 별거냐?”라는 말은 체념의 목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살아보겠다’는 가장 인간적인 반격의 해학이다.

해학의 미학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웃음은 도피가 아니라,

삶에 다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생존 방식이다.


<웃음은 예술이 아니라, 인간의 숙명>


〈까르르〉는 단순한 웃음의 시가 아니다.

웃음의 본질을 파고드는 짧은 철학이다.

웃음이 꽃피우고,

세상이 주저앉고,

인생을 다시 열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자기 존재를 다시 긍정한다.

이 시에서 해학은 말장난이 아니며,

웃음도 익살이 아니다.

웃음은 우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된 가장 오래된 본능이며, 가장 아름다운 미학이다. 각종 문학의 행사장에서 민교수님의 축사 중에서 던지는 농담 같은 한마디 속에도 교수님의 해학과 철학이 담겨있는 말이다


결국 이 시가 말하는 ‘까르르’는

해학의 웃음이다. '까르르'는 아이 같은 웃음이며 인간의 구원을 향한 커다란 삶의 의미를 담은 바다 위에 떠다니는 커다란 함선이라 하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박성진 주광일 시인-겨울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