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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장 마리 헤슬리, 광부가 화가로 변신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갱도의 어둠에서 붓의 떨림으로


장 마리 헤슬리, 고흐의 붓질에 응답한 한 광부의 변신


박성진 문화평론


갱도는 말을 삼키는 공간이다.

빛이 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침묵을 강요받는 곳.

광부의 하루는 늘 검은 손끝에서 시작해, 검은 숨으로 끝난다.

그 삶에 ‘예술’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그 어둠 속에서 붓의 떨림을 느낀다.


장 마리 헤슬리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의 출발점은 화실이 아니라 갱도였다.

캔버스보다 먼저 손에 익은 것은 곡괭이였고,

색채보다 익숙한 것은 탄가루의 검정이었다.

그가 고흐를 만났다는 말은,

미술관에서의 우연한 감상이 아니라

삶의 결이 처음으로 흔들린 순간을 뜻한다.


고흐의 붓질은 언제나 과잉이다.

정교하지 않고, 얌전하지도 않다.

선은 떨리고, 색은 서로를 밀어낸다.

그 붓질 앞에서 장 마리 헤슬리는

자기 손의 기억을 보았을 것이다.

곡괭이를 내리치던 리듬,

벽을 파고들던 반복의 힘,

그 모든 것이 고흐의 선 안에서 되살아난다.


잠 마리 헤슬리 그의 변신은 도약이 아니라 연속이다.

광부가 화가가 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신분의 상승을 떠올리지만,

헤슬리의 경우 그것은 손의 언어가

다른 도구를 선택했을 뿐이다.

땅을 파던 손이

이제는 시간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장식이 없다.

빛은 늘 무겁고, 인물은 고개를 숙인다.

색채는 밝아 보여도 어딘가 눌려 있다.

이것은 미학적 선택이라기보다

삶이 남긴 흔적에 가깝다.

고흐의 붓질이 그에게 준 것은

기법이 아니라 허락이었다.

자기 삶을 그대로 그려도 된다는 허락.


예술은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예술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게 만든다.

헤슬리는 갱도에서 이미

충분히 예술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다만 그 삶을 말할 언어가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화가로의 변신은

성공담이 아니라 증언이다.

광부의 어둠이 화가의 빛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이 끝내 빛의 자격을 얻은 순간이다.

고흐가 그랬듯,

장 마리 헤슬리 역시

세상을 아름답게 그리려 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정직하게 남길뿐이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야말로

예술이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갱도는 여전히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둠을 통과한 손이 그린 선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장 마리 헤슬리가

고흐의 붓질에 응답한 방식이다.

성곡미술관에서 보게 될 100여 점의

장 마리 헤슬리는 그렇게 눈부신 화가 고흐의 붓질에 매료되어 갱도에서 붓을 든 삶의

변곡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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